[헤럴드경제(이탈리아 베니스)=이정아 기자] #. 뽀얀 석면 먼지가 날리는 퀴퀴한 주방. 끝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가난한 이주 노동자의 손때 묻은 식기가 깨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의 아내가 산산조각 난 그릇 파편을 동공 없는 텅 빈 눈으로 바라봤다. 힘없이 축 늘어진 듯 보인 그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지난 20일 개막한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가장 화제가 된 독일관의 한 장면이다. 독일관에서는 튀르키예 출신 예술감독 카글라 일크(47)의 총괄로 건축가, 배우, 디자이너, 작곡가, 극작술 연구가 등 70여명의 예술가가 협업한 전시 ‘문턱(Threshold)’이 소개됐다. 전시명은 지난해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불가리아 작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소설 ‘타임 쉘터(Time Shelter)’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전시는 열악한 석면공장에서 일한 튀르키예인 이주 노동자와 황폐해진 지구를 떠난 마지막 인류의 거대 우주선, 두 개의 서사로 구성됐다.
베니스 동쪽 무인도인 세토사 섬으로 이어지는 독일관 전시. [베니스=이정아 기자] |
관람객들은 독일관 전시장에 들어서기 위해 2시간에 달하는 대기시간을 기꺼이 감수했다. VIP 사전 관람(프리뷰) 기간 내내 독일관 건물 앞에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대기줄이 300m가량 길게 늘어섰다.
전시의 백미는 전시장 중앙 나선형 계단으로 이뤄진 3층짜리 수직 구조물 안에서 벌어지는 한 편의 연극 같은 퍼포먼스다. 석탄 더미가 쌓인 1층에서는 먼지가 흩날리고, 지저분한 주방과 낡은 침실로 구성된 2층에서는 튀르키예에서 독일로 이주 온 이방인들의 소름 끼치는 기괴한 몸짓이 읽힌다. 옥상으로 연결된 3층에는 아버지인 늙은 광부가 나체로 흙을 파낸 뒤 땅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영상으로 상영된다.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감수하며 일하는 것만이 이방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인 듯 보인다. 그러나 시들어가는 동태눈을 한 이들은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자르디니 공원에 위치한 독일관 퍼포먼스 전시. [베니스=이정아 기자] |
자르디니 공원에 위치한 독일관 퍼포먼스 전시. [베니스=이정아 기자] |
극적으로 연출된 이 작품명은 ‘이름 없는 이를 위한 기념비(Monument to an Unknown Person)’. 전시장 곳곳에서 다섯 명의 배우들이 작가인 에르산 몬드타그(36)와 그의 이전 세대가 보냈던 일상을 연기했다. 관람객들은 연기하는 배우들 사이를 오가며 수시로 옴짝달싹할 수 없었는데, 오싹한 감정으로 몰아넣는 좁은 전시장 연출 때문이다. 이따끔씩 들리는 비명 같은 날카로운 소리는 위태로운 이들의 사적인 공간을 훔쳐보는 관람객들을 더욱 공포로 몰아넣었다.
실제로 독일은 튀르키예 계열 이민자가 가장 많은 국가다. 본격적인 이주는 1960년대 시작됐다. 당시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면서 놀라운 경제성장을 보여줬다. 당시 독일은 튀르키예를 비롯해 한국 등 외국인 노동자들을 적극 받아들였다.
이에 작가는 조부의 고향인 튀르키예에서 가져온 흙과 돌덩어리를 독일관 정문 문턱에 정리되지 않은 공사장처럼 어지러이 쌓았다. 나치 독일이 1938년 화려하게 리모델링한 독일관 건축물 좌우로 긴 틈에 모래 알갱이가 채워졌다. 작가는 “독일관은 튀르키예 이방인들의 토양을 품게 됐다”고 말했다.
독일관에는 이와 함께 유대인 작가 야엘 바르타나(53)의 영상 작품 ‘국가의 빛(Light to the Nations)’이 공개됐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우주선에는 지구를 떠나는 마지막 인류가 건설한 인공문명의 모습이 담겼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다 극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서라도 베니스 동쪽 무인도인 세토사 섬으로 이어지는 독일관 전시를 반드시 관람해야만 한다. 올해 독일관은 사상 처음으로 공식 전시장이 위치한 자르디니 공원만이 아닌, ‘제3의 공간’에도 전시장을 열었다. 무인도가 하나의 거대한 야외 전시장, 그 자체로 뒤바뀐 것.
의자에 누워서 영상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구성된 자르디니 공원에 위치한 독일관. 우주에서 부유하는 거대한 우주선에 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구성됐다. [베니스=이정아 기자] |
세토사 섬에는 로버트 리포크, 니콜 루윌리에, 얀 세인트 베르너, 마이클 애크탈러, 루이스 오누오라 추드 소키 등 5명의 작가가 선보인 사운드 작품들이 땅과 나무 사이 곳곳에 자연스럽게 심겨져 있었다. 푸른 하늘과 찬란한 햇빛이 감도는 초록의 섬이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기계음이 반복적으로 귓가를 때린다. 그렇게 관람객은 뒤틀린 차원의 세계로 이동한다.
특히 무너진 벽돌 잔해 더미에서 등 뒤까지 둘러싼 공간 음향 속에 갇혀 있다보면 현실과 동떨어져 홀로 내던져진 기분이 든다. 이어 사운드 작품을 따라 작가들이 재창조한 세토사 섬을 1시간가량 걷다 보면, 적막한 고요와 바다 냄새가 감도는 디스토피아적 세계 속에서 스스로 되묻게 된다. 과연 우리는 인류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새들만이 지저귈 뿐 그 누구도 답하지 않는다. 일크 예술감독은 “섬에는 경계가 없다”며 “소리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베니스 동쪽 무인도인 세토사 섬으로 이어지는 독일관 전시. [베니스=이정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