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12월 22일 텍사스 오스틴 AMD 본사에서 라이젠 시리즈를 발표하는 리사수 AMD 최고경영자(CEO)[AMD 제공] |
[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오늘은 AMD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날이다. 사실 모든 PC 게이머, 콘텐츠 제작자들, 그리고 누구든지 고성능 프로세서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날일 것이다. 바로 오늘이 라이젠(RYZEN)의 날이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는 2016년 12월 22일 AMD 본사에서 표면에 라이젠 브랜드 명이 분명하게 적힌 작은 칩 하나를 들어 보였다. 리사 수 CEO가 라이젠 7시리즈의 사양과 가격을 읊자 현장에 모여든 기자들과 AMD 팬(AMDer)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날이 바로 AMD와 리사 수 CEO의 운명을 바꾼 날이 되었다.
이날 발표된 라이젠 7은 당시 인텔의 경쟁작과 비교하면 연산처리 속도는 거의 유사하거나 더 뛰어났지만 전력 소비효율은 33% 높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가격이 절반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게이머들에겐 별다른 성능 향상은 없이 가격만 올리던 인텔 중앙처리장치(CPU) 대신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체재’가 생긴 셈이다.
라이젠 7 시리즈는 이듬해 1분기 본격 시장에 출시되자마자 게이머들에게 빠르게 팔려나갔고 리사 수 CEO는 국내외 게이머들에게 ‘그저 빛’, ‘빛사수’로 통하기 시작했다.
2016년 12월 리사수 AMD 최고경영자(CEO)가 새로운 CPU 라이젠 시리즈를 소개하고 있다. [AMD 유튜브 캡처] |
사실 라이젠 시리즈가 발표되기 전까지만 해도 AMD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아니 거들떠 보면 안 되는 회사였다. 무디스는 2015년 AMD의 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으로 지정했고 주당 20달러로 한때 인텔과 대등했던 주가는 1.6달러까지 하락했다. 경쟁사 인텔의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CEO는 AMD를 두고 “이제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회사니 신경 쓰지말고 새로운 경쟁자인 퀄컴에나 집중하라”고 폄훼할 정도였다.
그런 AMD를 인텔과 PC CPU 시장를 양분하고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아성에 도전하도록 이끈 것은 바로 ‘닥터 리사 수’ 였다.
1969년 대만 타이난에서 태어난 리사 수는 2살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수리 통계학의 권위자였던 아버지 수쩐화는 탈무드에 심취했다. 주변 동료들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은 모두 유태인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는 탈무드의 가르침에 따라 리사 수에게 5살부터 수학과 피아노를 가르쳤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2023년 6월 10일 대만국립칭화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고 있다. 리사수(오른쪽) CEO와 아버지 수쩐화. [대만국립칭화대학교] |
한때 뉴욕 줄리어드 음대 오디션을 치를 정도로 피아노에 뛰어났던 리사 수지만 그의 관심은 엔지니어링에 있었다. 열 살 때부터 동생의 자동차 장난감을 분해하고 조립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리사 수가 장난감을 분해하고 나면 더 복잡한 장난감을 사다 주는 등 딸의 재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줬다.
항상 “가장 어려운 일에 도전하라”는 것도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여성이자 아시아계, 즉 사회적 언더독(underdog·스포츠에서 이길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를 가리키는 말)으로서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높은 목표를 가지고 항상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담겼다.
아버지가 리사 수에게 삶의 태도를 가르쳤다면 어머니 샌디 수는 직접 자신의 인생을 통해 ‘도전하는 언더독’의 모범을 보였다. 대만에서 회계사였던 어머니는 미국에 와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여성으로서는 도전하기 어려운 건설 기계 도매업체를 차려 현재까지 사업을 성공리에 이어오고 있다.
수 CEO는 “어머니가 이곳 미국에서 자신의 사업을 이룩하고 삶을 이어가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항상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며 “어머니를 보고 항상 마음을 다잡았다”고 회상했다.
1986년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진학한 리사 수에겐 컴퓨터공학과와 전자공학과라는 선택지가 주어졌다. 그의 선택은 전자공학과였다. 당시로선 여성이 거의 선택하지 않았던 전자공학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는 “가장 어려운 전공일 것 같아서 선택했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가르침 그대로 선택한 셈이다.
학부 시절 실리콘 웨이퍼를 제작하는 과제를 수행하던 리사 수는 반도체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반도체는 매우 작고 정교한 것을 만드는 동시에 스스로 해낼 수 있는 무언가였다”고 말한다. 종종 반도체에 대해 “아름답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MIT 박사과정에 진학한 리사 수는 이후 반도체 업계에 기술적 전환을 가져온 걸출한 연구성과를 연이어 내놓는다. 그의 박사 논문은 실리콘 웨이퍼의 표면과 하층 사이에 얇은 절연막을 추가하는 ‘실리콘 온 인설레이터(SOI)’ 기술을 제안했다. SOI 기술은 제조 공정의 난이도는 높지만 고전압, 고온에서 저전력으로 빠르게 동작할 수 있는 반도체를 만들 수 있어 모든 반도체 기업이 채택하고 있다.
엘 라파엘 레이프 MIT 총장은 2022년 리사 수의 이름을 딴 교내 빌딩 명명식에서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듯이 리사 수는 졸업하기 훨씬 이전부터 새로운 기술을 개척해 왔다”며 그의 연구 성과를 칭송했다. 2001년 리사 수는 ‘MIT 테크놀로지 리뷰’로부터 ‘35세 미만 최우수 혁신가’로 선정됐다.
IBM 연구개발 부서 근무 당시 리사 수 [스탠포드대학 제공] |
1995년부터 2007년까지 IBM의 R&D 부서에서 근무하는 동안 리사 수는 40편 이상의 반도체 논문을 발표한다. 대표적인 연구 성과는 당시까지 알루미늄이었던 반도체 배선 재질을 구리로 바꿔 처리속도를 20% 이상 향상시킨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도 업계 표준으로 지켜지고 있다.
AMD를 비롯해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같은 연구 성과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그를 ‘박사(doctor) 리사 수’라는 존칭으로 부르고 있다.
IBM에서 성공적인 반도체 연구원이었던 리사 수는 2007년 프리스케일의 CTO로 자리를 옮기면서 경영자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훗날 MIT 졸업 특별 연설에서 그는 당시 결정에 대해 재치있게 설명했다.
“내가 기술업계를 둘러보니 많은 기업에서 MIT 박사들이 하버드 경영학 석사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결정했다. 내 남은 커리어를 하버드 경영학 석사생들을 위해 쓰지는 않겠다고.”
기술 기업에서 기술을 더 잘 알고 있는 엔지니어가 경영학만 배운 경영진보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게 리사 수의 신념이었다. 실제 그는 공학적 능력 뿐 아니라 뛰어난 마케팅 능력과 전략적 사고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으며 2년 만에 부사장 겸 총책임자로 승진했고 2011 프리스케일의 시장공개(IPO)를 성공리에 이끌었다.
그런 그가 이듬해 AMD의 부사장이 되었다는 소식은 미국 기술업계에도 충격이었다.
한때 애슬론 프로세서를 앞세워 인텔과 경쟁하던 AMD는 새로운 CPU 아키텍처 ‘불도저(Bulldozer)’와 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하나로 합친 가속처리장치(APU) 제품이 연이어 고배를 마시면서 파산 위기 직전에 몰려 있었다. 주력 제품의 연이은 실패로 AMD의 주가는 끝없이 하락했고 “불도저 아키텍처가 이름 그대로 주가를 밀어버렸다”는 비아냥이 시장에 떠돌았다.
리사 수를 ‘풍전 등화’의 AMD로 이끈 것은 한때 상사였던 전설적인 엔니지어 니콜라스 도노프리오였다. 그는 “AMD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지만 훌륭한 기술 인력과 고유 지적 재산권이라는 장점을 가졌다”며 “시기적으로 당신에게 아주 딱 맞는 곳”이라며 리사 수를 설득했다.
당시 선택에 대해 리사 수는 “이미 잘 나가고 있는 기업으로 가는 것은 쉬운 선택지이지만 매력적이지 않았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이겨내야 날 주목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AMD의 부활을 이끌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부사장이 된 리사 수는 당장 파산을 면하기 위해 어디서든 돈을 끌어와야 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은 AMD의 ‘계륵’ APU였다.
그는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MS)에 “AMD의 APU를 콘솔게임기의 ‘두뇌’로 써달라”는 제안을 던졌다. 사실 AMD의 APU는 CPU와 GPU 성능 모두 PC 용으로는 모자라지만 콘솔 게임기용으론 충분했던 데다 크기도 작아 콘솔게임기의 슬림화 추세에 맞았다. IBM 연구 개발 부서에서 일하며 플레이스테이션3 용 CPU를 개발한 경험으로 시장의 수요를 정확히 꿰뚫어 본 셈이다.
두 회사는 리사 수 CEO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엑스박스원과 플레이스테이션4는 콘솔 게임기의 중흥기를 열었다. 그 덕분에 2013년 10월 AMD는 5분기 만에 적자에서 탈출했고 이듬해에는 매출의 약 40%를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 확보했다.
콘솔게임기 시장에서의 실적을 바탕으로 CEO로 승진한 리사 수에게 CPU 아키텍처 ‘젠(Zen)’의 성공적 개발이 새로운 임무로 주어졌다. 당시 스마트폰 시장이 빠르게 확장되고 있었지만 수 CEO는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수만, 수억 개 이상의 기기에서 쏟아지는 데이터를 처리하려면 머지않아 고성능 컴퓨팅 능력을 갖춘 CPU가 필요하다고 보고 새로운 CPU의 성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
수 CEO는 AMD 제품의 생산을 AMD에서 분리된 글로벌파운드리스 대신 파운드리 업계 1위인 TSMC에 맡기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TSMC가 당시로선 가장 최신인 14나노미터(㎚) 반도체 미세 공정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AMD는 인텔의 경쟁작보다 높은 효율로 뛰어난 연산 성능을 가진 라이젠 CPU를 개발할 수 있는 기반을 갖췄다.
과거 애슬론64 시리즈 개발을 이끌었던 짐 켈러의 진두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라이젠 시리즈’ 개발에 위기가 닥친 것은 최종 샘플 테스트 과정에서였다. 텍사스 오스틴 본사 실험실에 도착한 샘플은 테스트는 커녕 부팅조차 되지 않았다.
인도 출장 중에 소식을 들은 수 CEO는 바로 ‘아폴로 13호 모드’라는 이름으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달 착륙 임무 도중 치명적 사고에도 불구하고 우주인 전체가 살아 돌아온 아폴로 13호처럼 프로젝트를 구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었다. 수 CEO는 TF의 연구원들에게 “실패는 선택지에 없다(Failure is Not an Option)”며 신제품 시험 일정 전에 문제를 해결하도록 격려했다.
결과적으로 TF는 결함을 빠르게 찾아냈고 새로운 CPU 라이젠 시리즈를 성공리에 출시했다. 수 CEO가 엔지니어 당시 경험에 기반해 빠르게 대응하지 못 했다면 신제품 출시가 늦어지며 AMD는 재기 불능의 상태로 빠졌을지도 모른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는 회사의 이름과 제품을 알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직접 달려간다. 2018년 F1 상하이 서킷에서 마틴 브런들 기자가 페라리 스폰서 자격으로 참여한 리사수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느냐”며 인터뷰를 신청하다 AMD의 CEO임을 알아채고 당황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X 캡처] |
서버용 CPU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클라우드가 보급될수록 서버 시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수 CEO는 인텔 제온 프로세서에 대항하는 에픽 프로세서를 출시해 바이두, MS 등을 공략했다. 때마침 터진 인텔 CPU 보안 게이트의 반사 이익을 받긴 했지만 서버 CPU도 AMD를 믿고 쓸 수 있다는 믿음이 시장에 확산 됐다.
수 CEO의 리더십 아래 AMD는 다시 성공 궤도에 올랐다. AMD는 PC CPU 시장에서 인텔과 7대 3의 구도를 만들어냈고 1% 미만이었던 전체 CPU 시장에서 점유율을 올해 1분기 20.6%(판매량·머큐리리서치 기준)까지 끌어올렸다.
AMD의 부활과 성장은 수 CEO에게도 부(富)를 안겨다 줬다. 지난 4월 포브스가 선정한 억만장자 대열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지난 1년간 AMD의 주가가 2배로 뛰면서 그의 자산은 한때 12억달러까지 늘어났다. 지난 2019년에는 5850만달러의 보수를 받아 미국 상장사 CEO 중 최고 연봉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욱 값진 것은 그의 업적에 대한 각계의 찬사다. 2021년에는 여성 최초로 미국 전기전자학회(IEEE)에서 수여하는 로버트 N 노이스 메달을 받았다. 노이스 메달은 반도체 업계 최고의 명예로 꼽힌다. 수상 소감에서 그는 “위대한 리더들은 자신의 팀이 생각했던 것의 120%를 해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며 팀과의 소통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2020년부터 내리 4년 동안 포춘으로부터, 2023년에는 포브스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 선정되기도 했다. 포춘 지와의 인터뷰에서 “충분한 수의 여성들이 현장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술 분야에서 여성이 가지는 잠재력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고위 기술직 역할은 매우 경쟁이 치열하며 결국 항상 그 일에 적합한 최고의 인재를 기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여성들의 분발도 촉구했다.
AMD가 CPU 시장에서는 인텔과 비견되는 실력을 입증했지만 AI 반도체 시장에서는 엔비디아에 미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하필 엔비디아의 CEO가 같은 대만 타이난 출신에 5촌 친척인 젠슨 황이라는 점도 세간의 비교에 기름을 부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리사수(오른쪽) AMD 최고경영자(CEO)와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두 사람은 모두 대만계 미국인이자 5촌 친척 뻘이다. [게티이미지] |
그러나 수 CEO는 자신만만하다. 지난해 코드컨퍼런스에서 그는 “AI 시장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기 때문에 아직 경제적 해자를 형성한 기업이 없다”고 말했다. 현재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AI 칩 회사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AI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엔비디아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수 CEO는 현재 AI 시장이 빠르게 외연을 확장하고 있는 만큼 어느 한 AI 칩 제품이 다른 제품보다 반드시 우위를 점하는 ‘이분법적 시장’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경제적 해자는 특정 분야에서 경쟁 우위를 유지하는 기업의 능력을 말한다.
그는 엔비디아의 제품이 AI가 대규모 언어 모델(LLM)의 훈련에는 탁월하지만 AMD의 제품은 AI 추론 작업에 더 적합하다며 “전적으로 제조업체가 구성 요소를 어떻게 결합하는 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