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와 다를 바 없는 소녀인데 “미래를 꿈꿀 수 없어요”

전북 정읍에 사는 고3 리지 양은 부모가 파키스탄 출신인 미등록 청소년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나고 자랐지만, 대학을 진학하지 못하면 추방당할 처지다.

“독한 여자라 하지 마!” 지난해 가을, 리지(18·가명) 양은 전북 정읍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섰다. 중학생 때부터 함께 밴드부를 해온 친구와 함께였다. “연예인이나 한번 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을 했는데, 운 좋게 방송에도 출연하게 됐다.

무대 의상은 친할머니가 만들어준 한복. 선곡은 이정현의 ‘와’. 떨리지는 않았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좋아해 지역 대회에서 1등을 한 경험도 있었다. 중학생 때까지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 노래방에 가면 주로 에일리, 블랙핑크의 곡을 고른다.

외진 지역에 살아 친구들과의 나들이 코스도 늘 비슷하다. 리지는 “밥 먹고 노래방 가고, 카페 갔다가 ‘인생네컷’ 찍고, 재밌는 영화 있으면 영화 보고 늘 똑같다”며 “고3이라 요즘은 다들 공부하느라 바빠서 모여서 논 것도 작년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리지는 정읍에 사는 고3 수험생이다. 그리고 미등록 외국인 청소년이다. 부모님은 모두 파키스탄 출신이다. 경기 안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는 정읍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파키스탄에 있던 시절 한 회사에서 한국 교류 업무를 맡던 중, 안양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그렇게 한국에서 4남매가 태어났다. 리지가 장녀, 밑으로 각각 고2, 중2, 초4 동생이 있다.

▶“언제 한국 왔어요?” 무심한 질문들=“언제 한국에 왔어요?” 전국노래자랑 무대에서 진행자는 리지에게 당연한듯 물었다. “여기서 태어났는데요.” 담담하게 답했다. 관객석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20년 가까이 한국에서 살았지만 리지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얼마 전 부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리지는 “수학여행에서도 (자신이) 외국인처럼 생겼으니 걸어가던 사람들이 친구들까지 같이 외국인으로 보고 영어로 말을 걸고, 동네 버스를 타 학생 카드를 찍으면, ‘왜 학생 카드를 찍느냐’고 혼나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한국 사회 밖에서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지만, 법적 한국인은 아니다. 리지를 처음 보면 누구나 외국인으로 여기지만, 정작 영어는 ‘입시용’으로 배운 게 전부다. 파키스탄어 역시 기초 회화 정도만 할줄 안다. 리지는 “엄마가 파키스탄어를 가르쳐주려고도 했는데, 아빠가 외국어를 쓰면 학교 가서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며 집에서도 한국어만 써왔다”고 했다. 리지가 이방인이 되지 않길 바랐던 가족의 배려였다.

▶한시 체류자격 얻었지만 “성인 되면 어쩌나”=고3, 입시를 앞둔 리지의 진학 고민은 같은 반 친구들에 비해 한층 복잡하다. 리지는 지난해 법무부의 한시적 체류허가 제도 승인을 받아, 학업 체류 비자(D4)를 받은 상태다. 미등록 외국인 청소년들의 교육권을 보장하는 취지로 마련된 제도다. 하지만 체류가 인정되는 기간은 청소년까지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한국을 떠나거나, 취업 비자 혹은 유학 비자로 전환하거나. 하지만 사실상의 선택지는 하나, 대학 진학 뿐이다. “할 줄 아는 건 한국어뿐”이라는 리지가 당장 출국해 머물 곳은 없다. 고졸 신분일 리지가 받을 수 있는 취업 비자도 없다.

리지를 지원해온 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은 “외국인에게 부여하는 취업 비자 중 당장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미등록 외국인이 취득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지적했다. 외국인 취업 비자는 E1부터 E10까지 나뉘는데, 전문 인력 비자인 E1~E7 비자는 최소 학사 학위 이상이 필요하다. 비전문인력 비자인 E8~E10 비자는 5년 이상 체류한 외국인은 자격을 주지 않는다.

리지는 대학 졸업 후 취업 문제까지 고려해 미래를 그려보고 있는데 대안이 마땅치는 않다. 자신과 같은 미등록 외국인 청소년을 돕고 싶다는 생각에 한때 상담학과도 고민했으나 이내 접었다. 주변에선 취업이 쉬운 간호학과를 추천했지만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지금은 사회복지학과를 고민하고 있다.

김 위원은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청소년기에 전공 선택의 자유부터 막히는 게 사실”이라며 “성인이 된 미등록 청소년들에게 제한 없이 안정적인 체류 자격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정부가 이 부분까지 고려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법무부 한시적 체류허가 비자 부여 심사를 담당하는 지역별 출입국사무소에서도 이런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 외국인 학생을 지원하는 한 청소년센터 관계자는 “이미 성인이 된 상태에서 체류 허가를 받으려는 사례가 있는데, 출입국에서조차 선례가 없으니 특정활동 취업비자(E7)를 부여하는 게 가능한지 확신을 못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 대신 미등록 청소년 품는 지역사회=다시 말해 한국 정부가 주는 체류비자는 말 그대로 ‘머무를 시간’을 몇 년 연장해줄 뿐이다. 그 사이, 리지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준 건 온전히 지역사회의 몫이었다.

특히 학교의 도움이 컸다. 리지가 졸업하는 고교에선 무슬람인 리지 남매들을 위한 급식을 매일 따로 마련하고 있다. 이 학교 교감인 A씨는 “리지 남매들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있기 때문에, 식단에 대해선 신경을 써주고 있다”며 “수학여행을 간다든지, 외부 활동이 있을 때에도 인터넷으로 미리 식당 메뉴를 찾아보면서 행선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이 학교에 외국인이 입학한 것은 개교 이래 리지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없었다. A씨는 “의사소통 문제가 있었다면 어려움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한국에서 태어나 초·중등과정을 마치고 왔기 때문에 전혀 고민은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리지의 대학 진학을 위한 고민도 교사들이 함께하고 있다. 리지는 “학교에서 외국인 전형으로 대학에 갔던 학생이 없다 보니, 선생님들이 함께 전형 공부를 하시고 ‘이런 게 있다더라’라며 항상 보여주는데 선생님들도 처음이라 많이 어려워들 하신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한국에 오래 머물 수 있을까요”=성인을 앞둔 미등록 외국인 청소년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어렵사리 진로를 선택하더라도, 학사 전용 유학생 비자(D2)를 받기 위한 ‘잔고’ 증명이란 문턱에 걸리기도 한다. 한국에서 자란 미등록 외국인 청소년과, 해외에서 들어오는 유학생을 구분하지 않고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탓이다.

이주배경청소년지원재단 관계자는 “유학생 비자를 받으려면 통장에 2000만원의 잔고가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미등록 외국인 청소년이 그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등록금 마련 문제도 남아있다. 우선 미등록 외국인은 국가장학금 신청 대상이 아니다. 한번이라도 휴학을 하면 유학 비자를 잃기 때문에, 대학을 쉬며 돈을 벌기도 어렵다.

“가고 싶은 대학은 솔직히 없어요. 너무 어려워요. 그냥, 어떤 학교를 가야 한국에 오래 머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전부예요. 장학금, 취업률, 기숙사 같은 걸 찾아보면서 혼자 우선순위를 매겨보고 있어요.” 대학 입시 수시 전형 원서 접수 일정은 3개월남짓 남았지만 리지는 여전히 막막하다. 박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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