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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문혜현 기자] 지난해 1인당 신용카드 소지수가 4.4개로 금융위기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간 카드결제액도 940조원이 넘었다. ‘현금없는 사회’ 가 대세가 되면서 카드 결제 규모가 커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으로 읽힌다. 문제는 카드발급 증가가 단순히 경제 활동성만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인당 카드발급수가 늘어나면서 카드론은 물론 ‘돌려막기’ 성격의 대환대출도 지속해서 늘고 있다. 현금서비스 잔액도 증가세다. 서민 경제가 경고음을 보내고 있다고도 읽히지만, 불필요한 빚을 져 소비하는 오남용의 문제도 지적된다.
4일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경제활동인구 1인당 신용카드 소지 수는 4.4매로, 2011년(4.8매)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금껏 1인당 신용카드 매수는 경기가 어려울 때마다 늘었다. 경제활동인구 1인당 신용카드 소지 수는 이른바 ‘카드사태’가 있었던 2002~2003년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인 2009~2011년에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2.6매였던 카드 소지 수는 2002년 4.6매로 크게 늘었다가 2003년 4.1매로 감소하기 시작했고, 금융위기 이후 경제 상황이 어려웠던 2009년 다시 4.4매를 기록한 뒤 증가세를 거듭해 2011년 4.8매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가 계속 줄었다.
카드업계는 코로나19 대유행이 신용카드 확산에 불을 지핀 것으로 보고 있다. 경기가 위축되면서 동시에 물가와 금리가 오르자, 실질 소득이 줄어든 이들이 카드 이용을 늘린 것이다. 실제 2019년 3.8매까지 떨어졌던 1인당 카드수는 코로나19 기간 내내 증가해 지난해 4.4매로 늘었다.
카드사들의 ‘현금성 마케팅’도 카드발급을 늘렸다. 회원 모집 형태가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바뀌면서, 캐시백·페이 포인트 혜택을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5월 말 개정된 여신전문금융업법(여전법) 제14조 제4항 제3호 시행령에 따르면 카드사는 ‘신용카드 발급과 관련해 그 신용카드 연회비의 100분의 100을 초과하는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거나 제공할 것을 조건으로 하는 모집’을 하지 못한다.
이에 카드사들은 소비자가 신용카드 발급 이후 일정 금액 이상을 사용하거나, 공과금 자동 납부를 설정하는 등 조건을 충족하면 1~2개월 내로 적게는 5만원, 많게는 10만원 이상의 캐시백·포인트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사실상 ‘꼼수’ 마케팅이다.
현금으로 돌려받는 캐시백·포인트 혜택은 고객 마음을 정확히 간파했다. 재테크 카페 등에서는 카드 여러장을 새로 발급받아 캐시백 혜택을 받아 챙기는 ‘카드 풍차돌리기’ 팁도 올라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꾸준히 회원 모집을 해야 하는 카드사 마케팅과 고금리 시기 급전 창구를 찾는 소비자의 니즈가 맞물려 카드 발급이 늘고 있는 것 같다”며 “이른바 ‘짠테크’의 일환으로 카드 발급·이용 혜택을 꼼꼼히 챙기려는 소비자도 증가한 영향”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여러 장의 카드를 한꺼번에 소지하면서 나타나는 ‘돌려막기’다. 9개 카드사(롯데·BC·삼성·신한·우리·하나·현대·KB국민·NH농협카드)의 지난달 말 기준 카드론 잔액은 40조5186억원으로 역대 최다였던 4월(39조9644억원) 대비 5542억원 증가했다.
이와 함께 카드론을 갚지 못해 카드론을 빌린 카드사에 다시 대출받는 대환대출 잔액도 5월 말 기준 1조9106억원으로 증가세다. 1년 전(1조3417억원)보다는 6000억원 가까이 늘었다.
결제를 미루는 리볼빙 이월잔액도 7조2817억원으로 4월(7조3176억원)보다는 줄었으나 여전히 규모가 크다.
대기업에 다니는 40대 조 모씨는 “부부가 모두 대기업 부장급이라 월 수입은 많지만, 학원비 등 목돈 결제액이 많아 리볼빙을 쌓아두다 연말 성과급 때 털어내곤 한다”면서 “소비 규모가 커지면서 현금만으로 결제가 어렵지만, 그렇다고 줄일 순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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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한 카드발급을 제한하는 규제가 약하단 지적도 나온다. 신용카드 연체율이 12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한 미국의 경우 신용카드 발급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편이다. 체이스(chase)은행은 ‘5/24’ 규정에 따라 24개월 이내에 다른 카드사의 카드 상품을 포함한 5개 이상의 카드를 보유한 소비자에겐 카드 발급을 해주지 않는다.
다국적 금융서비스 기업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서 발급하는 아멕스(Amex) 카드 또한 ‘평생 한 번 규정’을 두고 있는데, 해당 카드사 카드를 한 번이라도 보유한 바 있을 경우 회원가입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다. 또 미국에선 우리나라와 달리 일회성으로 카드를 만들고 취소하면 신용점수에 악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카드사들도 무분별한 카드 발급을 방지하기 위해 ▷이벤트 직전 6개월 동안 해당 카드 발급 이력이 있는 소비자 ▷해당 카드사에서 카드 이벤트 혜택을 이미 받은 소비자는 혜택 제공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규정을 두고는 있다. 그러나 해외 규정에 비해선 미흡하다는 평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6개월 동안 카드 발급을 하지 않았던 새 카드를 찾아 캐시백 혜택을 받고 해지시키는 등 각종 소비자 편법도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 규정은 없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카드 이용을 활성화하는 목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는 것과 관련한 규정은 현재 없는 상태”라며 “현금성 혜택을 제공하는 모든 카드 마케팅이 정당하다고 볼 순 없지만, 또 전부 위법하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카드 발급수가 늘어나면서 동시에 카드업계 연체율도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올 1분기 8개 카드사의 30일 이상 평균 연체율은 1.85%로 지난해 말 1.64%보다 0.21%포인트 높아졌다. 이 중 연체율 2%를 넘긴 곳도 세 곳이나 된다.
결국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연체율과 신용카드 발급률이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소비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라며 “우리는 저축이나 절약보다는 신용카드를 잘 돌려 쓰면서 신용점수를 관리하는 방법에 더 관심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일반 대출보다 이자율이 훨씬 높은 리볼빙 이용률이 높아지는 점도 소비자들이 미래 이득을 할인해 쓴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소득이나 고용이 안정적이지 않은 상태로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가계부담이 가중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금융 교육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