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영화 ‘퍼펙트 데이즈’ 흥행 뒤엔 24년 태광의 의지 [히든 스팟]

엄재용(오른쪽) 티캐스트 대표이사 사장과 박지예 티캐스트 씨네큐브팀장이 8일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내 ‘퍼펙트 데이즈’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일본 도쿄 시부야의 공공 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는 반복되는 매일을 산다. 아침에 일어나 화분에 물을 주고,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마시고, 카세트테이프로 올드 팝을 들으며 출근해 화장실을 청소한다. 편의점표 점심을 먹으며 필름 카메라로 나무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을 찍고, 퇴근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단골 식당에 가서 술 한 잔을 기울인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누구보다 충만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의 하루는 반짝인다.

우리의 하루는 어떤 기쁨으로 채워져 있는지 묻는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지난 12일 10만 관객을 돌파했다. 통상 예술영화가 관객 1만명을 채우면 상업영화가 100만 관객을 동원한 것과 맞먹는다고 여기니 그야말로 ‘1000만 영화’에 버금가는 흥행을 거둔 셈이다. 개봉 7주차에 접어든 ‘퍼펙트 데이즈’는 ‘삶을 반추하게 하는 영화’라는 입소문을 타고 지금도 조용한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기대 이상의 흥행은 곧 수익이지만 ‘퍼펙트 데이즈’를 수입·배급한 태광그룹의 계열사 티캐스트는 이번 흥행이 좋은 문화예술을 많은 사람과 나눴다는 데 더욱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믿고 보는 좋은 영화’를 올렸고 그에 대한 공감을 얻었다는 보람이 크다는 것이다.

티캐스트와 티캐스트가 운영하는 예술영화관 씨네큐브가 예술 그 자체에 집중한 행보를 이어가는 배경에는 문화예술 지원을 무엇보다 중요한 기업의 책임으로 여겨온 태광의 의지가 숨어있다.

“‘퍼펙트 데이즈’는 평양냉면 같은 영화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맛인가 싶지만 어느 순간 찾게 되듯 영화 속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게 보이지만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며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죠. ‘퍼펙트 데이즈’처럼 좋은 문화예술을 전파하는 것이 씨네큐브가 존재하는 이유고 태광이 문화예술 지원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지난 8일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빌딩에서 만난 엄재용 티캐스트 대표이사는 배급사 관점에서 ‘퍼펙트 데이즈’의 흥행 성적을 내세우기에 앞서 한명의 관객 입장에서 영화의 감동을 우선 전했다.

흥행 비결을 묻자 엄 대표는 “소중한 일상을 일깨우는 여운이 있어 관객이 계속 들어오는 게 아니겠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씨네큐브가 오랜 기간 좋은 예술영화를 널리 나누려고 노력해 온 게 밑바탕이 됐다고 했다.

엄 대표는 “최근 예술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올해는 수익성이 상당히 괜찮은 상황이지만 예술영화 상영은 수익보다는 사회공헌 측면에서 하는 것”이라며 “그룹의 지원이 있었기에 수익성과 상관없이 좋은 영화를 나누며 예술을 공유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칸 필름마켓에서 ‘퍼펙트 데이즈’를 직접 사 온 박지예 티캐스트 씨네큐브팀장도 이번 흥행에 대해 “운이 좋았다”면서 “좋은 영화를 관객이 선택한 것이고 좋은 영화를 들여올 수 있게 회사가 예술영화 사업의 취지를 이해하고 기회를 준 것”이라고 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스틸컷

씨네큐브는 2000년 문을 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영화관으로 현재 티캐스트가 운영하고 있다. 영화·미술 등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진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도심에도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만들었다. 소위 ‘돈 되는 사업’은 아니지만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봤고 그 믿음은 한 번도 꺾이지 않았다.

박 팀장은 “최고경영진의 확고한 의지가 바탕이 돼 시작한 일이라 그룹에서도 씨네큐브의 가치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면서 “최소한 손해를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해 신경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수익을 기대하긴 어렵다. 특히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이후 작년까지는 적자가 나기도 했는데 적자가 나면 나는 대로 흔들리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실제 코로나19로 영화업계가 직격탄을 맞았던 2021~2022년 오히려 투자를 늘린 것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당시 관객이 반토막 이하로 줄면서 문 닫는 극장이 즐비했지만 티캐스트는 억대의 돈을 들여 씨네큐브 상영관의 의자를 바꾸고 매표소를 리모델링했다. 모두가 위축됐을 때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씨네큐브가 24년간 지켜온 문화예술 향유의 가치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최근에는 ‘배리어프리(Barrier-free·장벽 없는) 영화 상영회’를 시작했다. 장애를 넘어 더 많은 이에게 문화예술의 힘을 전달하고 싶어서다.

배리어프리 영화는 기존 영화에 화면을 설명하는 음성 해설과 화자, 대사, 음악, 소리 정보를 담은 자막을 넣어 시청각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영화다. 예컨대 ‘아무개가 문을 열고 들어와 숨을 한 번 쉬었다’는 해설이나 ‘비 오는 소리가 나온다’는 자막이 들어가는 식이다.

씨네큐브는 올해 7월부터 매월 1회 배리어프리 영화를 무료로 상영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첫 상영회 때는 국립서울농학교 초등학생을 초청해 애니메이션 ‘드림빌더’를 선보였고 8월에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상영했는데 일반 관객도 100명 넘게 모여 훈훈한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후문이다.

엄 대표는 “장애인에게 예술영화는 특히 접근성이 좋지 않다”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좋은 영화를 관람함으로써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직접 둘러본 씨네큐브는 여느 멀티플렉스 영화관처럼 붐비지 않았지만 교복을 입은 학생부터 50~60대 중장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이 삼삼오오 모여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태광의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영화에만 치우쳐 있지 않다. 2009년 문화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하고자 세화예술문화재단을 설립해 각종 전시와 예술 나눔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8일 찾은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앞에 초대형 조각 작품 ‘해머링 맨(망치질하는 사람)’이 설치돼 있는 모습 김은희 기자

재단은 세화미술관은 물론 흥국생명빌딩 전체를 하나의 열린 미술관으로 꾸며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편하고 가깝게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빌딩 앞을 지키는 초대형 조각 작품 ‘해머링 맨(망치질하는 사람)’을 비롯해 로비와 복도, 에스컬레이터 옆이나 계단까지 곳곳에 예술작품이 가득하다.

엄 대표는 “그룹 입장에서는 도심 빌딩 서너 층을 임대만 해도 수익을 상당히 챙길 수 있음에도 이를 포기하고 사람들에게 휴식공간, 문화공간을 제공했다”며 “이는 태광이 사회적으로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를 넓히는 공헌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내년이면 씨네큐브는 ‘25살 청년’이 된다. 어떤 변화를 준비하고 있냐 물었더니 ‘한결같고 싶다’고 했다. 지금처럼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와 닿을 만한 삶과 죽음, 가족, 사랑을 다룬 ‘믿고 보는 좋은 영화’를 나누겠다는 계획이다.

박 팀장은 “씨네큐브가 지향하는 바는 ‘도심 속 오아시스’”라며 “정신없이 바쁘고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한결같은 안정감과 함께 영감과 지적 자극을 주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엄 대표는 “모두를 위한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회를 이어가는 동시에 종로구민, 인근 직장인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개발해 누구나 편하게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김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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