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뱅킹 쓸 줄 몰라서 은행에 왔는데, 한 시간 넘게 기다렸어요.”
서울 도봉구에 있는 한 시중은행은 마감을 10분 앞두고도 대기 인원이 30여 명에 달했다. 약 한 시간 전에 은행에 방문했다는 김화래(70) 씨의 순번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김씨는 “몇 년 전 집 근처 은행이 사라진 이후에는 기본 1시간을 기다려야 업무를 볼 수 있게 됐다”면서 “은행 오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길다”고 토로했다.
안내 직원 A씨는 “지점 방문객의 70%이상이 65세 이상의 노인”이라면서 “평상시에도 마감 시간 1시간이 지나도록 대기하고 있던 고객 응대를 하는 것이 예사”라고 했다. 도봉구에 거주하는 안상복(78)씨는 “전에는 기업은행, 우리은행 등 (타 은행) 지점도 많았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다”고 했다.
반면 강남구 소재 은행의 오후 풍경은 도봉구와 대조적이었다.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한 시중은행에서는 마감 시간이 다가왔지만 대기하는 인원은 보이지 않았다. 해당 지점 직원 B씨는 “가끔 모바일 폰뱅킹을 못 쓰는 노인분들이 오긴 하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다”고 했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업무가 대중화되며 은행 통폐합이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 내 지역별 격차도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은 영업점 운용비용 부담과 경영 효율화를 위해 점포 수를 줄이고 있지만, 사실상 금융취약계층이 많은 지역의 점포가 먼저 줄어들면서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도봉구는 고령인구 5600명 당 지점 한 곳…강남은 500명도 안돼=5일 헤럴드경제가 4대 시중은행(KB국민·하나·신한·우리은행)의 서울시 자치구별 지점 수를 종합한 결과, 지점이 가장 적은 도봉구는 13곳에 그치지만, 지점 수가 가장 많은 강남구는 189곳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 전체 지점 1140여개 중 도봉구에는 단 1%(13개)의 지점이 있지만, 강남에 17%(189개)의 지점이 몰려있다.
지점 수는 14배 차이나지만, 인구 수 차이는 크지 않았다. 강남구는 2024년 2분기 기준 주민등록인구가 56만 2136명으로, 도봉구 주민 수(30만 8060명)의 1.8배에 그쳤다.
은행지점 방문을 선호하는 노인 인구로 한정해 살펴보면, 지역별 지점 이용 편의성 차이는 더 커졌다. 도봉구는 노인 5567명이 은행 한 곳을 이용하는 반면, 강남구는 은행 한 곳 당 475명이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봉구 노인이 강남구 노인보다 11.7배 더 붐비는 은행에 방문한 셈이다.
도봉구 은행 직원 C씨는 “이전에 강남구 지점에서 근무했을 때보다 도봉구 지점이 훨씬 바쁘다”면서 “몇 년 새 도봉구 내에서 통폐합한 타 은행도 많아져서 쏠림이 더 심해졌다”고 했다.
이같은 현상은 서울 전역에서 나타났다. 은행 지점별로 65세 이상 인구 5000명 이상이 이용하는 곳은 도봉구와 강북구로 각 평균 5567명, 평균 5379명의 노인이 은행 한 곳을 함께 이용했다. 도봉구와 강북구는 지점 수가 각 13곳으로, 서울시 전체 지점 중 각 1%만을 차지했다.
지점별로 65세 이상 인구 1000명 미만이 이용하는 곳은 중구(255명), 강남구(475명), 종로구(489명), 서초구(652명) 순이다. 중구는 4대은행 본점이 있는 구로, 지점 수도 강남구에 이어 두 번째(104곳)에 달했다. 종로구는 지점 수는 60곳이지만 65세이상 고령인구 수가 하위 2번째(2만9000여명)로 다른 구에 비해 적은 편에 속했다. 그 외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 중 강남구와 서초구 노인이 비교적 여유롭게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강남3구(강남구, 서초구, 송파구)에는 서울시 전체 은행 지점 중 약 32%가 있다.
▶구별 은행 지점 격차, 경제 규모 외에 인구 규모도 감안해야=은행이 지점을 줄이는 것은 운영 비용이 절감 차원에서다. 디지털 금융의 확산으로 온라인 금융거래 비중이 늘자 지점 창구를 이용한 금융거래는 현저히 줄었다. 핀테크와 빅테크의 금융시장 참여가 확산되면서 은행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사업모델 전환 필요성이 커지자 은행의 지점 통폐합은 가속화됐다.
다만 구별 은행지점 격차는 인구 규모가 아닌 경제의 규모에 따른다는 것이 전문가의 분석이다. 금융경제연구소가 지난 6월 발표한 은행의 영업점 축소와 금융 접근성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지방 세액을 기준으로 5조 원에 육박하는 강남구는 은행 지점이 가장 많은 반면, 지방 세액 3000억 원 미만인 강북구와 도봉구는 영업점 수가 각각 가장 적다.
주요 4대은행의 서울 소재 지점은 2002년 1347개에서 2024년 8월 기준 1140곳으로 줄었다. 다만 강남구는 도봉구보다 감소율이 더 적었다. 10년새 강남구는 유인점포 수가 14.89% 감소한 반면, 도봉구는 50% 감소했다.
은행들은 경영효율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지점 유지가 힘들다는 입장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주식회사인 은행은 주주의 이익을 대변해야하기 때문에 영업이익이 나지 않는 지점을 유지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점 폐지는 금융서비스를 이용하던 기존 소비자들에게 불편과 권익 축소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신규 금융소비자의 선택권을 제약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은행업이 라이선스업임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는 지적이다.
김상배 일하는시민연구소 연구위원은 “시중은행 순수익 이자 마진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고령인구를 위한 지점 유지 등) 은행의 사회적 책임은 부족한 실정”이라고 했다.
금융위원회는 2023년 4월 은행업감독업무시행세칙 개정 계획 등을 포함한 은행 점포폐쇄 내실화 방안을 확정한 바 있다. 내실화 방안에는 은행 점포 폐쇄 여부를 결정하기 전 ▷사전영향평가 내실화 ▷정보공개 범위·내용 확대 ▷소비자 지원·보상 방안을 포함하도록 했다. 당시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점포이용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고령층에게는 점포폐쇄가 곧 금융소외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금융당국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대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은행에게만 사회적 책임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지적하며 “정부와 지자체, 금융당국에서도 은행이 지점을 유지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현실가능한 대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은행권은 지점을 줄여나가는 대신 노령인구 특화 점포 등으로 이를 보완하겠다는 입장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금융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디지털 교육 센터를 여는 등 변화하는 모바일 환경에 맞춘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 김광우·정호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