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대런 아세모글루(Daron Acemoglu), 사이먼 존슨(Simon Johnson) 교수, 시카고대 제임스 로빈슨(James A. Robinson) 교수다. 국내 미디어들은 이들이 대한민국을 민주주의와 포용적 제도(inclusive institution)로 경제를 발전시킨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았다고 전했다. 궁금증이 생긴다. 어떻게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포용적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었을까?
스웨덴 왕립과학원 발표자료 캡쳐 |
▶ 모두 식민지였지만…같은 역사 다른 선택
수상자들의 연구는 두 가지 형태의 식민지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한다. 포용적 제도를 택한 곳과 착취적(extractive) 제도를 벗어나지 못한 곳이다. 전자는 식민지에서 정착지로 바뀐 미국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유럽 등 해외 이주민들이 원주민들을 사실상 몰아내고 정착민이 국민 대부분을 구성하는 나라를 이뤘다. 특히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통해 대통령제 연방정부라는 가장 강력한 민주주의 제도를 만들었다. 이른바 ‘특별한 미국’(America Exceptionalism)의 시작이다.
후자는 열강에 의해 그야말로 수탈을 당한 대부분의 식민지들이다. 대한민국은 일본에게 착취를 당했으니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후자에서 전자로 전환해 성공한 거의 유일한 나라다.
독립 후 민주주의를 택한 나라는 우리뿐 아니다. 민주주의를 얼마나 제대로 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다. 세 수상자의 연구를 잘 들여다 보면 경제적 번영은 식민지 여부 보다는 국민들이 어떤 제도를 선택했는지가 더 중요했다.
▶ 포용적 제도의 진정한 동력은 시민혁명
스웨덴 왕립과학원 발표자료 캡쳐 |
지금의 강대국으로 불리는 유럽이나 미국, 일본도 중세 때에는 글로벌 패권을 갖지 못했다. 지금의 강대국들이 힘을 갖게 된 계기는 제도의 혁신이다. 오늘날 성공한 사회들은 구습, 즉 착취적 제도를 타파하고 포용적 제도인 법치와 민주주의를 성립시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수상자들은 이를 ‘지배계층과 대중 간 권력과 신뢰의 갈등’(conficts over political power and the problem of credibility between the ruling elite and the population)으로 풀이했다.
일부 기득권에만 유리한 착취적 제도는 사회 전체의 효율을 높이지 못해 중장기적 번영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그럼에도 기득권 세력은 스스로 착취적 제도를 포용적 제도로 바꾸기를 꺼린다. 사회 전체로는 이득이 커도 기득권 세력 입장에서는 손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착취적 제도에서는 대중의 불만이 쌓이기 쉽다. 특히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고 정보 교류와 교육이 보편화되면 대중은 훨씬 조직적이 된다. 비민주적 국가에서도 대중은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시민혁명이다. 특히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적인 시민혁명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시민혁명으로 착취적 제도를 고수하던 기득권 세력이 권력을 대중에 넘기면서 민주주의와 법치, 포용적 제도가 자리를 잡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3·1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 등이 중요한 이유다.
얼핏 역사는 몇몇 탁월한 지도자에 의해 만들어진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이는 국민과 대중을 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과 대중이 함께 했기에 지도자의 역량이 발휘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발표자료 캡쳐 |
▶ 불균형 해소, 경영에도 중요…지배구조 개선이 관건
스웨덴 왕립과학원 발표자료 캡쳐 |
착취적 제도의 폐해는 심각한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전세계 상위 20% 국가의 글로벌 국내총생산(GDP)의 80%를 차지하는 게 현실이다. 상위 20% 국가의 부는 하위 20% 국가 부의 30배가 넘고그 격차는 해마다 더 벌어지고 있다.
노벨상 분야가 ‘경제’이다 보니 수상자들의 저서들을 보면 ‘국가’ 단위의 설명이 이뤄졌다. 국가를 기업으로 바꾸면 경영으로도 풀 수 있다. 정치 제도를 경영으로 다시 풀면 지배구조(governance)다. 지배구조 문제도 결국 의사결정과 성과 배분에 있어서의 비효율과 불균형으로 드러난다.
미국 증시 최상위 종목의 시가총액은 웬만한 선진국 GDP를 능가한다. 미국 기업 독주의 원인을 살피면 크게 두 가지다. 기술 발전과 부의 분배다. 기술 혁신에 성공하는 미국 기업이 많을 뿐 아니라 혁신을 꿈꾸는 많은 해외 기업들도 미국 증시를 두드리고 싶어 한다. 자연스럽게 전세계 투자자들의 돈도 미국으로 몰리고 있다. 뒤집으면 다른 나라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미국만 못하다는 뜻이다.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에 대해 “연구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고 기술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대중의 후생을 희생해 독점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도 공존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요한 점은 경쟁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정부가 규제를 행사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아세모글루와 존슨 교수도 공저한 ‘권력과 진보’(2023)에서도 소수 엘리트와 권력자에 의해 결정되는 기술 혁신이 부의 집중을 초래할 수 있는 만큼 민주주의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행히 최근 국내에서도 기업 밸류업에 대한 관심이 높다. 코리안디스카운트(Korean discount) 해소를 위해 시장 및 기업관련 제도를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합리적 시장에서 이뤄지는 금융투자는 부의 편중을 완화시킬 수 있는 주요한 기재다. 시장 참여자, 즉 일반 투자자들이 들러리가 아닌 기업 지배구조의 참여자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경영효율 극대화와 합리적인 부의 분배가 가능하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한민국 간판기업들에 꾸준히 투자하던 대한민국 부자들이 미국 주식으로 방향을 튼 지 벌써 수 년 째다. 자국 금융투자 시장이 위축되거나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면 경제시스템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
미국 증시로의 쏠림은 물론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중국과 유럽도 비슷한 고민에 빠져있다. 글로벌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연구들이 좋은 자극제가 됐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