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를 봐요!’, ‘벽’ 정진호 그림책 작가
점·선·면 고려하며 세심히 만든 그림책
독자도 ‘비밀’ 알고 보면 더 재밌을 것
정진호 그림책 작가가 29일 제1회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이 열린 부산 벡스코에서 강연하고 있는 모습. 이민경 기자. |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볼로냐 라가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우리나라의 정진호 작가가 ‘점·선·면’의 개념을 이용해 그림책을 더 재밌고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공개했다.
제1회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이 이틀째를 맞이한 29일 정 작가는 부산 벡스코를 찾아 ‘선과 면으로 만들어낸 세계’ 주제로 강연했다. 가장 작은 점에서, 그 다음 선으로, 최종적으로 면을 이뤄가는 그림책 제작과 읽기 방식을 아낌없이 공개했다.
정 작가는 “그림책에서 점의 역할은 ‘글’이 한다”고 했다. 글이 놓이는 자리(글자리)가 어떤 위치를 점유하느냐가 작가가 자기만의 디테일을 담아낼 수 있는 점적인 요소라고 본 것이다.
‘The Dark‘[출판사 Orchard Book] |
그는 존 클라센(Jon Klassen)의 ‘다크(The Dark)’ 작품을 예시로 들었다. ‘글자리’를 아주 영리하게 쓰는 대표적 그림작가라고 소개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어린이 ‘라즐로’가 의인화된 ‘어둠’과 이야기하면서 사건이 일어나는 그림책인데, 라즐로와 어둠의 대사가 각기 위치한 자리가 아주 흥미롭다는 것이다.
‘The Dark’ [출판사 Orchard Book] |
“라즐로의 대사는 밝은 문 위에 올려진 반면, 어둠의 대사는 깜깜한 방 안에 적혀있다. 어둠이 마치 라즐로를 꾀어내듯이 문 너머에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다음 장면에서는 글자리 위치가 기가막히게 바뀐다. 갑자기 무서워진 라즐로가 ‘아래층으로 갈까?’라고 말하는 글자리가 소심하게 작은소리로 나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 작가 책에도 글자리는 예민하게 선택된다. ‘바나나가 더 일찍 오려면’이라는 작품에서는 한 문장이 의도적으로 멀찍이 떨어져있다. 가운데정렬 대신 왼쪽 페이지의 끝과 오른쪽 페이지에 끄트머리에 최대한 붙은 모습이다.
‘바나나가 더 일찍 오려면’ 중에서. |
“왜냐하면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나오는 다음 장면의 첫문장과 넘기기 전의 장면의 마지막 문장이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글자리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이렇게 디테일을 챙겨서 그림책을 만들 수 있다. 저는 이런 부분에서 큰 재미를 느끼고 세밀하게 작업한다. 글자리가 전체 책의 리듬감과 분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본다.”
그림책에서 선의 요소는 “책 안에 존재하는 특정한 방향성”이라고 정의했다.
문화적 배경에 의해서 오늘날 사람들은 책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는다. 그림 역시 마찬가지로,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으로 사선 방향이 정석이다.
정 작가는 ‘망태할아버지가 온다’(박연철)를 사례로 소개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망태할아버지가 잡아간다’고 삿대질을 하며 혼내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전복’됐다.
‘망태할아버지가 온다’ 중에서 |
“뭔가 어색하다. 의도가 있는 것이다. 스포일러지만 과감히 이야기한다. 진짜 망태할아버지가 오고, 엄마를 잡아간다. 따라서 이 장면 자체가 결말에 대한 암시인 것이다. 책의 방향을 아는 독자라면 눈치 챌 수 있다.”
정 작가의 작품 중에선 ‘별과 나’를 꺼낼 수 있다. 캐릭터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어딘가 어색하게 이동한다. 그는 “왜냐하면 이 사람은 발전하고, 나아가려는 사람이 아니다. 집에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서다”라며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글이 없는 그림책의 특성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서사가 진행되면 1분도 안되어서 그림책을 다 읽게 된다. 일부러 반대로 그려서 턱턱 부딪히며 조금이라도 천천히 읽도록 의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별과 나’ 중에서 |
그는 “선은 이야기의 개성, 읽어가는 중심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선을 잘 다루는 작가는 캐릭터가 다가가는 방향을 더 유독 신경쓰게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 면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갔다. 소설이나 시집이 꽂힌 서가와 달리 유독 그림책 코너는 지저분하다. 아름다운 질서정연한 정렬은 꿈도 꿀 수 없다. 정 작가는 “왜냐하면 그림책은 책의 면적(판형)이 책의 내용과 밀접하게 연결돼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모든 책은 ‘제본’을 숙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데, 그림책 작가들은 이 제본마저도 하나의 이야기 요소로 사용한다.
“이수지 작가의 책은 이런 면에서 독보적인 장면이 있다. ‘파도야 놀자’를 보면 왼쪽 세계와 오른쪽 세계가 만나는 이야기를 가운데 제본선을 이용해서 말한다. 또, 조선경 작가의 ‘키스’는 제본을 양쪽 끝에서 함으로써 두 권의 책이 마치 키스하는 것처럼 만든다.”
‘파도야 놀자’중에서 |
정 작가는 “면적인 요소가 글과 그림에서 보여주지 않는 숨은 의미를 보여주고, 작가의 실험적 시도 역시 면에서 가장 많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군복무 시절 이수지 작가의 ‘동물원’을 보면서 그림책 작가의 꿈을 꾸었다는 정진호 작가는 2015년 첫 그림책 ‘위를 봐요!’로 라가치상을 받는 등 그림책 작가로 데뷔하자마자 두각을 드러냈다. ‘위를 봐요!’에 이어 ‘벽’, ‘별과 나’, ‘나랑 놀자’, ‘금손이’, ‘루루 사냥꾼’ 등 활발히 작품을 내놓고 있다.
“그림책 작가들은 여러가지를 고려한다. 단지 예쁜 그림이 떠올랐어! 이러고 만들지 않는다. 저는 특히 제가 요즘 만드는, 만들려고 노력하는 그림책에서 점, 선, 면의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고 넣으려고 하고 있다 다른 책들을 볼떄도 이런 요소를 계속해서 신경쓰면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