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상식 지키는 민혜진役 연기
청춘스타·멜로퀸에서 장르물 강자로
배우 김현주 [넷플릭스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마지막 기회가 왔다. 모든 것을 되돌리고, 마침내 악의 근원을 뿌리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모든 ‘지옥’의 시작이었던 정진수(김성철 분)가 민혜진(김현주 분)의 차를 붙잡고 말한다. “제발 살려줘.” 지칠 대로 지쳤어야 하지만 민혜진의 눈빛은 살아있었다. 정진수의 한 마디 후 불과 30초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 눈동자엔 찰나의 갈등과 고민이 스쳤다. 결단 뒤엔 흔들림 없이 단호하게 행동한다.
“‘지옥’은 무수히 많은 의문점을 남기는 작품이에요. 그 중 한 장면이 이 장면이죠. (김)성철 배우도 그러더라고요. ‘민혜진은 왜 절 구해줘요?’ (웃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짧지만 강력했다. 화면 가득 채운 김현주는 ‘빈틈없는’ 민혜진이었다. 순간적으로 고민은 서렸지만, 결단은 빠르고 단호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시즌2 마지막회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정의와 상식, 휴머니즘의 상징인 민혜진이라는 인간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을 버리지 않은 인물이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은 현실의 디스토피아를 찾아온 전형적인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물이다. 납득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영역과 존재 앞에서 압도당하고 무력해지는 인간의 절망을 그린 드라마다.
작품은 ‘천사’로 불리는 괴물 형상의 초월적 존재가 등장해 난데없이 죽음을 ‘고지’하고, ‘지옥행’을 명명하며 벌어지는 세계를 그린다. 이 세계 안엔 ‘천사의 고지’를 ‘신의 심판’으로 규정하는 세력(새진리회)과 이를 불가해한 재난으로 인식하는 집단(소도), 혼란스런 세상을 더 어지럽히는 광신도 집단(화살촉),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존한다.
김현주가 연기한 민혜진은 이 세계의 유일한 상식이자 정의다. 김현주는 “시즌2는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4년 뒤의 세계를 그리지만 민혜진은 내적 변화 없이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간다”고 말했다.
시즌2의 혼란은 ‘부활자’들의 존재와 함께 커진다. 민혜진은 압도적 지옥도에서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향해 세상을 바꾸려 할 때 유일하게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다.
“민혜진과 다른 사람들의 차별점은 모두가 세력을 키워 자기만의 세상으로 바꾸려 할 때, 그는 원래대로 돌려놓는 사람이라는 점이에요. 그게 무척 외로운 싸움처럼 느껴졌어요.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닌데, 고독한 느낌이 강하게 표현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지옥’ 시즌2는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정진수 새진리회 1대 의장과 박정자(김신록 분)의 지옥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지옥’은 무엇인가.
김현주는 “무수히 많이 생각해봤다”며 “민혜진의 지옥은 ‘엄마의 죽음’일 것이다. 민혜진은 엄마가 눈을 감는 장면을 반복해서 볼 것 같다. 그것이 바로 민혜진의 지옥”이라고 했다.
고지도 받지 않았지만 민혜진에겐 이미 삶이 지옥이었다. 그가 현시 지옥을 견디는 것은 되돌릴 수 있다는 한 줌의 희망 때문이다.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지옥도의 유일한 희망이다. 최종회에선 민혜진이라는 인물의 존재 이유가 분명히 드러난다. 지옥의 괴물들에게 잡아먹히려는 정진수를 구해주며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와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배우 김현주 [넷플릭스 제공] |
“수없이 고민했어요. 왜 이 사람을 구하고, 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해답은 민혜진이라는 데에 있었어요. 민혜진이기에 했던 행동이었던 거죠. (민혜진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먼저 구해야 하는 인간이에요. 하지만 그 사이에 순간적인 고민이 비추기를 바랐어요.”
김현주는 올해로 데뷔 27주년을 맞았다. 그는 1997년 MBC 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로 데뷔한 이후, 세 번의 굵직한 변화를 맞았다. 시기마다 완전히 다른 개성과 캐릭터를 강렬하고 확고하게 그렸다. 데뷔 이후 오랜 기간 시대를 호령한 청춘스타이자 ‘로코퀸’이었고, 2010년대, 특히 30대 중반 이후로는 짙은 멜로를 누구보다 잘 그려내는 얼굴이었다. 2020년대 이후 40대의 김현주는 ‘장르물’에 최적화된 배우가 됐다. 배우는 매작품 다른 역할로 다른 얼굴을 보여주긴 하지만, 한 사람의 이미지가 시대마다 달리 적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오래 연기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연기를 하며 어느 순간부터는 이왕 하는 일인데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 하나 배역을 맡을 때마다 신중하게 됐다”고 돌아봤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드라마 스타에게 TV 콘텐츠를 통한 변화의 폭은 적었다. 특정 장르에 국한된 콘텐츠의 한계 때문이다. 김현주는 “요즘엔 장르물이 많지만, 그 당시 TV 주인공은 멜로 아니면 코미디 장르가 다수였다”며 “도전의 폭이 좁아 연기에 대한 아쉬움과 갈증이 있었다”고 돌아봤다.
지난 4~5년 사이 김현주는 도전과 변신에 성공했다. ‘지옥’을 비롯해 ‘정이’(2023)에 이르기까지 연상호 감독과 꾸준히 호흡을 맞췄고, ‘선산’(2024), ‘트롤리’(2022~23), ‘언터커버’(2021), 왓쳐(2019) 등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어느 순간 연기를 하는 나도 지겨운데 보는 사람들도 지겹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다양한 걸 해보고 싶은데, 사실 도전을 두려워하는 성격이에요. 나이를 먹고 플랫폼이 바뀌고, 선택지가 다양해지니 제게도 기회가 오더라고요. 굉장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갈망하던 시기와 생태계가 바뀐 시점이 맞아 떨어졌으니까요.”
갈증은 여전하다. 아직 해보고 싶은 것도 많다. 그는 “장르물을 한 번 해보니 스스로도 재미와 자신감을 느끼게 됐다”며 “지금은 또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장르물을 쭉 했으니, 다시 본연의 나로 돌아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거 같아요. 단순하고 잔잔하지만, 대사도 아주 많은 그런 작품이요. 그동안 정의의 편에 많이 섰으니 아주 악랄하고 비열한 인물도 좋고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