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적 인수합병 통해 방산 사업 확장
김승연 회장, 김동관 부회장 방산에 아낌 없는 투자
톱10 진입 위해 미국 시장 공략 속도
김승연 회장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회장으로 선임
[헤럴드경제=한영대 기자] 글로벌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K-방산의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RI)에서 이달 초 발표한 ‘2023년 세계 100대 방산 기업 실적 분석 보고서’에서 국내 주요 방산업체 4사(한화그룹, 한국항공우주산업, LIG넥스원, 현대로템) 모두 톱100에 진입했다. 한국 방산 4사 매출액은 110억달러로 일본 방산 5사 매출액(100억달러)보다 높다.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기업은 단연 한화이다. 한화그룹은 방산 부문에서 57억1000만달러의 매출을 달성, 국내 방산 기업 중에서 가장 높은 24위를 기록했다. 2022년(21위)에 이어 2년 연속 톱30에 진입했다. SIRI는 2022년 매출까지 ㈜한화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순위를 별도로 기록했지만, 지난해 매출은 한화 방산 사업을 통합해 집계했다.
김승연(왼쪽 여덟번째) 한화 회장과 김동관(왼쪽 일곱번째) 한화 부회장,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요 경영진들이 주력 제품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화 제공] |
잇따른 해외 수주가 한화의 톱30 진입에 큰 역할을 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해 폴란드와 3조4500억원 규모의 K9 자주포 판매 계약을 체결했다. 호주와는 3조2000억원 규모의 장갑차 레드백 129대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2022년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을 인수하면서 매출 규모가 커진 것도 순위 상승에 이바지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K9 자주포(오른쪽)와 K10 탄약운반차.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제공] |
한화그룹 모태는 1952년 설립된 한국화약주식회사이다. 그룹 뿌리가 방산인 것이다. 이후 태양광, 금융, 유통 등 다양한 사업에 진출했지만 방산의 존재감은 여전히 크다. 한화그룹 전체 매출에서 화약, K9 자주포 등 방산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이상이다.
한화는 2000년대만 하더라도 SIRI 방산 톱100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2013년 ㈜한화는 86위를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톱100에 진입했지만, 한국항공우주산업(62위)과 LIG넥스원(72위)보다 순위가 낮았다.
한화는 공격적인 M&A 및 사업 재편을 통해 글로벌 방산 시장에서 입지를 넓혔다. 2014년 당시 삼성그룹과의 빅딜을 통해 인수한 삼성테크윈(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삼성텔레스(현 한화시스템)가 대표적이다. 삼성테크윈, 삼성텔레스를 인수하기 위해 한화그룹이 당시 투자한 자금만 8400억원이다.
한화오션이 건조한 율곡이이함. [한화오션 제공] |
한화는 삼성그룹과의 빅딜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성장 가능성이 불확실한 방산 시장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한화의 투자는 ‘신의 한 수’로 평가받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K9자주포, 한화시스템 통신·레이다 장비가 글로벌 시장에서 수주 행진을 이어가면서 한화 방산 사업의 효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에는 2조원의 유상증자를 통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 육해공 통합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으로 거듭났다. ‘한국판 록히드마틴’이라는 꿈에 한 발짝 다가가게 됐다.
한화의 방산 포트폴리오 다각화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등 글로벌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는 현재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글로벌 고객사들을 대상으로 육해공 모든 전력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으로 어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올해 9월말 기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한화시스템, 한화오션 방산 부문의 수주 잔고는 44조원을 넘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31조원)과 비교했을 때 41.9% 늘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지난달 한화오션 시흥R&D캠퍼스를 방문해 임직원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한화 제공] |
한화가 글로벌 방산 시장에서 입지를 확보하기까지 김승연 한화 회장과 그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 부회장의 과감한 투자가 없었다는 불가능했다고 업계는 분석했다. 김승연 회장과 김동관 부회장은 방산회사 인수는 물론이고 연구개발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연구개발비는 지난해 기준 8142억원으로 전년(5867억원) 대비 38.8% 증가했다. 매출에서 연구개발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10%에 육박한다.
김승연 회장과 김동관 부회장은 방산 사업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현장 경영도 이어갔다. 김승연 회장은 올해 8번의 현장경영을 단행했는데, 이 중 4곳이 방산 시설 및 사업장이었다. 김승연 회장이 방문한 방산 사업장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전 R&D 캠퍼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창원사업장 ▷㈜한화 글로벌·한화에어로스페이스 보은사업장 ▷한화오션 중앙연구원 시흥R&D캠퍼스 등이다.
김동관(오른쪽) 한화그룹 부회장과 스티븐 쾰러(가운데) 미 해군 태평양함대 사령관 제독이 올해 10월 거제사업장에서 정비 중인 ‘월리 쉬라’함 정비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한화오션 제공] |
김승연 회장은 올해 10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보은사업장에서 “인공지능(AI)이 핵심이 되는 미래 방위사업 시장에 대비하기 위해 미래 전장 환경에 맞춘 솔루션을 개발, 글로벌 방산 시장에서의 경쟁우위를 확보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관 부회장은 해외 군 관계자 및 주요 국가 정상들과 만나는 등 방산 수주전 최일선에 나서고 있다. 올해 10월에는 미 해군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스티븐 쾰러 제독(대장),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을 연이어 만나 한화 방산의 경쟁력을 소개했다. 김동관 부회장은 두다 대통령에게 “기술 이전 및 현지화로 폴란드의 국방력 강화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마이클 쿨터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해외사업 총괄 대표이사 내정자.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제공] |
한화의 목표는 2030년까지 글로벌 방산 톱10에 진입하는 것이다. SIRI 방산업체 톱100에서 10위에 오른 중국 CETC는 지난해 기준 방산 부문 매출 160억5000만달러를 기록했다. 한화보다 2배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차이가 크지만 글로벌 방산 시장 흐름을 고려했을 때 한화가 충분히 격차를 좁힐 수 있다고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을 기점으로 한화에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당선 직후 “미국 조선업이 한국의 도움과 협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화그룹이 인수한 미국 필리조선소 전경. [한화 제공] |
한화는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 인연이 있는 김승연 회장은 최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회장으로 선임됐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해외 사업 총괄 대표이사로 마이클 쿨터 전(前) 레오나르도 DRS 글로벌 법인 사장을 선임했다. 그룹의 글로벌 방산 사업도 총괄하게 될 쿨터 내정자는 기업에 합류하기 전까지 미 국무부 정치군사담당 부차관보, 국방부 차관보 대행 등을 수행했다.
한화오션은 현지 시장 진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한화시스템과 함께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필리조선소를 인수했다. 한화오션 기술력은 미국 시장에서 이미 인정을 받고 있다. 올해 8월에는 4만톤급 군수지원함인 월리쉬라함의 창정비 사업, 지난달에는 미국 해군 7함대 소속 3만1000톤급 급유함인 유콘함의 정기 수리 사업을 따냈다.
신현우(왼쪽 다섯번째)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사장과 월터 샤프(왼쪽 네번째)·커티스 스캐퍼로티(왼쪽 여섯번째)·로버트 에이브럼스(오른쪽 두번째) 전 한미연합사령관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제공] |
해군 전략자산뿐만 아니라 육군 전략자산의 미국 진출도 추진하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K9 자주포의 미국 수출을 타진하고 있다. 전직 한미연합사령관 3명은 지난달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창원 사업장에 방문해 “K9 자주포는 미군에 반드시 필요한 전력”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국가에서 진행하는 방산 사업에도 적극 뛰어들고 있다. 한화오션은 3조원 규모의 폴란드 잠수함 현대화 사업인 오르카 프로젝트, 60조원이 투입되는 캐나다 순찰 잠수함 프로젝트 수주를 노리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K9의 추가 수출도 예상된다. 이한결 키움증권 연구원은 “인도, 베트남 등에서 K9 도입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화 방산 수출에 영향을 미칠 단기간 변수는 국정 공백이라고 업계는 분석하고 있다. 무기 계약은 국가와 국가 간 거래인 만큼 방산 수출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략 자산을 만드는 기업과 정부가 원팀을 이뤄야 한다. 문제는 계엄 사태로 우리나라 외교가 진공 상태에 빠진 것이다.
다만 어성철 한화오션 특수선사업부장(사장)은 17일 기자와 만나 “국정 공백으로 한화오션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며 “미국에서는 한국이 계속 MRO 사업을 하길 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