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적, 문화적 경계 벗어난 탈K
개개인 성향 존중한 취향의 K
오징어게임2 [사진, 넷플릭스]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시즌1 총 시청시간 22억 520만 시간. 넷플릭스 역대 최고 흥행작인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 94개국에서 가장 많이 본 작품이다. 시즌2 공개를 앞두고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선 시사회 입장권을 걸고 4.56㎞ 달리기 대회를 열었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즐겼다. 마침내 공개한 ‘오징어게임’ 시즌2는 현재 93개국에서 시청 순위 1위다.
한국에서, 한국인이 만든, 한국적 콘텐츠의 총칭인 ‘K-콘텐츠’의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 과거의 성공 경험을 발판 삼아 ‘K의 경계’를 넘어 ‘확장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 더이상 문화적, 지리적 경계와 특수성에 갇히지 않고 ‘보편성’을 확보하면서도 개인의 서사에 집중한 콘텐츠로 전환하고 있다. ‘취향의 다양성’을 겨냥한 콘텐츠를 내놓는 것이다.
유현석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장직무대행은 “K-콘텐츠의 궁극적 성장은 굳이 K를 붙일 필요 없이 글로벌 시장에서 중심이 되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라며 “이미 영화 ‘기생충’, ‘오징어 게임’, 방탄소년단을 통해 K가 전 세계적인 문화 확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대로에서 넷플릭스 프랑스가 오징어게임 시즌2 공개를 기념해 시즌1 속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벤트를 열었다. [연합] |
K-팝 그룹 블랙핑크 로제와 팝스타 브루노 마스가 함께 부른 ‘아파트’.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핫100’ 최고 8위,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최고 2위까지 오른 이 곡은 한국 못지 않게 세계에서 더 많이 오르내리는 곡이다. 국내 최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일간 톱100차트에서 38회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빌보드 글로벌 200’과 ‘글로벌 200(미국 제외)’ 차트에서 장장 8주 연속(약 240일)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K-콘텐츠를 즐기는 것은 한국과 동아시아만이 아니다. 이제 K-콘텐츠는 한국보다 세계에서 더 많이 보고 즐기는 콘텐츠가 됐다. 전문가들은 “2025년의 K-콘텐츠는 더 넓은 시장에서 더 많은 이용자가 만나는 K-콘텐츠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새로운 시대의 ‘K’는 기존 K-콘텐츠의 성공 방정식을 이어받아 다양한 형태로 확장한다. 올해의 주요 키워드는 ‘범K’, ‘탈K’라 볼 수 있다. 모두를 포용하는 보편성을 갖춘 ‘범(universal) K’, K-콘텐츠의 지역성, 문화성을 벗어난 ‘탈K’다.
K-드라마의 실험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이미 시작됐다. 특히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은 보편성, 특수성을 모두 갖춘 콘텐츠다. 여기에 글로벌 OTT라는 넷플릭스의 날개를 달자, 전 세계인의 콘텐츠로 자리할 수 있게 됐다.
걸그룹 블랙핑크 로제와 팝스타 브루노 마스의 듀엣곡 ‘아파트’ [연합] |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오징어게임’에 담긴 한국 사회의 문제의식이 비단 우리만의 고민이 아닌 점을 확인했다”며 “넷플릭스의 중요한 전략 중 하나는 ‘로컬의 글로벌화’다. 각 지역(국가)이 가진 색깔과 정서를 잘 끄집어내 보편적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콘텐츠가 더욱 주목받을 수 있었다”고 봤다.
‘오징어 게임’ 시즌2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갈등과 분열의 시대, 극단적 자본주의의 폐해를 담고 보다 글로벌 시청층의 기호에 맞춘 범 K-드라마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로제의 ‘아파트’ 역시 한국의 지역성을 살린 ‘술게임’을 소재로 하면서도 영미권 대중에게도 친숙한 선율, 세계적인 스타 브루노 마스와의 협업으로 보편성을 확보했다.
방탄소년단 블랙핑크를 통해 범K를 실현한 K-팝은 지난해부터 이미 ‘탈K’에 집중했다. 하이브의 미국 현지화 1호 걸그룹 캣츠아이, JYP엔터테인먼트의 미국 현지화 걸그룹 비춰, SM의 현지화 보이그룹 디어 앨리스를 통해서다. 이들 세 그룹은 K-팝 시스템 안에서 태어나 영미 주류 팝시장에서 활동하며, 멤버들 대부분 해당 국가 출신이다.
일찌감치 동아시아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K-팝은 3세대 빅그룹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를 통해 주류 음악시장으로 진출했지만, 소위 ‘메인 스트림’으로 불리는 팝 본고장 미국, 영국의 벽은 높았다. 비영어권 가수의 한계를 넘고, 팝가수로 안착하기 위해서다.
최강럭비 |
‘오징어 게임’과 같은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보편적 콘텐츠와 함께 두드러지는 것은 ‘소수 취향’ 콘텐츠의 강화다. 각양각색의 대중은 결코 하나의 취향이 아니며, 이들에겐 수백, 수천가지의 취향이 존중한다는 것을 인지하며 나타난 변화다. 보편적이되 개개인의 성향을 존중한 ‘취향의 K’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취향, 색깔, 차별성이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며 “과거엔 매스컬처라는 하나의 콘텐츠가 모든 시장을 장악했었지만 이젠 작은 팬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강력한 힘을 가진다면 뿔뿔이 흩어졌던 팬덤을 하나로 결집해 글로벌 시장에서 큰 덩어리로 뭉치게 한다”고 말했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통한 각양각색의 장르물 드라마가 부쩍 늘어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넷플릭스를 비롯해 티빙, 쿠팡플레이 등 OTT가 주력하는 ‘소수 취향’ 콘텐츠는 스포츠와 스포츠 예능이다. 넷플릭스에선 ‘최강 럭비’, 쿠팡 플레이에선 ‘슈팅스타’와 럭비, 축구, F1 중계, 티빙에선 야구 중계와 야구 예능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백영재 넷플릭스 글로벌리제이션 부문 디렉터는 “개인의 취향은 무척이나 다양하다”며 “콘텐츠 추천을 위해 숨겨진 취향을 찾고 예측 밖의 사용자 타깃팅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의 ‘2024 콘텐츠 이용행태 조사’와 ‘2024 온라인동영상서비스 이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국내 OTT인 티빙에서는 스포츠 중계를 보기 위해 유료 구독을 선택한 비율이 15.4%로, 30대(30.6%)와 남성(75.8%) 비중이 유달리 높았다. ‘취향 저격’이 거둔 성과다.
K-팝 역시 마찬가지다. K-팝은 글로벌 그룹을 통해 보편성을 얻은 장르이면서도 시스템을 상징하는 대명사이면서, 오래도록 서브 컬처로도 자리해왔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글로벌 시장에서 K-팝의 성공 요인은 대중문화 전체에서 볼 때 강력한 서브 컬처의 힘을 가졌기 때문”이라며 “개인의 정체성에 집중한 블랙핑크 로제의 앨범처럼 거대 서사가 해체되고 개인의 서사와 취향에 집중하는 서브컬처적 속성이 강화된 음악이 주류 대중문화를 선도해나갈 것”이라고 봤다.
비춰 [JYP엔터테인먼트 제공] |
K-콘텐츠의 새로운 가능성은 ‘시스템의 이식’에 있다. K-콘텐츠를 만든 제작 시스템, K-팝 아티스트를 키운 트레이닝 시스템 등 소프트웨어 강국의 제작 노하우를 글로벌 무대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이른바 ‘K(한국인) 없는 K-팝’ 그룹으로 통하는 캣츠아이, 비춰, 디어앨리스는 한국이 아닌 영미 주류 무대에서 활동하나, K-팝 시스템을 통해 태어난 그룹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자국의 가수는 몰라도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는 안다”는 말이 나올 만큼 글로벌 슈퍼스타가 된 두 K-팝 그룹이 태어난 K-팝 시스템의 성공 전략이 세계적인 음반 유통사와 레이블의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다.
다만 성공 여부는 여전히 물음표다. 이미 출사표를 던진 세 그룹이 글로벌 무대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비춰의 멤버는 혹독한 K-팝 트레이닝 시스템의 문제점을 꼬집으며 그룹을 떠났다. 그럼에도 K-팝 시스템의 이식은 영미권을 거쳐 남미로도 향한다. JYP는 남미에서도 걸그룹을 선보이겠다는 계획이다.
뮤지컬 업계도 글로벌 대중을 사로잡으면서도 저마다의 전략으로 시장을 개척 중이다. 보편적으로 통용될 글로벌 코드와 한국 제작 시스템, 창·제작진의 현지 진출로 K-뮤지컬의 새 장을 열고 있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가 단독 리드 프로듀서로 참여한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는 현재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고, 올해엔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한다.
‘한한령’ 이후 현지 진출이 어려웠던 중국 시장은 연출, 작가, 작곡가의 진출이 활발해 현지 제작사와 한국인 창작진이 호흡을 맞춘 작품들이 속속 성과를 내고 있다. 최근 중국 상하이대극원에선 오세혁 연출가와 이진욱 작곡가가 참여한 현지 뮤지컬 ‘위험한 연민’이 관객과 만났다.
유현석 콘진원 원장직무대행은 “전 세계 이용자들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글로벌 코드와 한국의 제작 시스템이 현지 아티스트, 제작 인력과 만나는 초국적 제작 시스템을 통해 K-콘텐츠가 세계 대중문화의 중요한 축이자 글로벌 스탠다드 콘텐츠로 자리잡는 과정이 이어지리라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