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물건을 포인트 내에서 가져갈 수 있어
상반기 창신동과 영등포 쪽방촌에 3·4호점 예정
[동네한바퀴 갈무리] |
[헤럴드경제=손인규 기자]“전에 줄 서서 물건 받을 때는 늦게 줄 서서 못 받은 사람과 먼저 받은 사람들끼리 싸움도 많이 났어요. 줄 서는 게 자존심 상하기도 했고요. 이제 여기서는 그런 거 없이 내가 원하는 물건만 가져갈 수 있어 너무 좋아요” (김수용·62)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은 지난 3일 오전 서울역 근처 동자동 쪽방촌 골목. 하지만 유독 한 가게 앞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게에 들어서니 20여명 남짓한 사람들이 제각기 진열된 물건들을 고르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언뜻 보면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자그마한 소형 슈퍼마켓. 하지만 여기는 서울시가 지난 2023년 7월 국내 처음으로 문을 연 ‘온기창고’ 1호점이다.
서울역 근처 동자동 쪽방촌 골목길에 있는 온기창고. 손인규 기자 |
온기창고는 쪽방촌 후원 물품을 나눠주는 편의점 형태의 스토어다. 여러 민간기업이나 후원자들이 보내준 물품이 진열돼 있다. 후원 물품인 만큼 모두 공짜지만 여기는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만 이용할 수 있다.
유호연 서울역쪽방상담소 소장은 “온기창고를 이용하려면 회원가입을 해야 하는데 회원은 동자동 쪽방촌에 거주하는 주민 누구나 될 수 있다”며 “여기 동자동 쪽방촌 거주 주민이 약 1200명 정도 되는데 이 중 821명이 온기창고 회원”이라고 말했다.
동자동 온기창고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주민 모습. 손인규 기자 |
쪽방촌 주민은 매주 2만5000포인트를 받아 이를 온기창고에서 물품을 구매하는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라면 1000포인트, 햇반 1000포인트 등이다. 전기장판처럼 고가 물품은 2만포인트를 넘기도 한다.
쪽방촌 주민은 자신이 가진 포인트 내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을 맘껏 고를 수 있다. 어떤 날은 라면, 햇반 등 식품을 구매하고 요즘처럼 추운 날에는 내의나 핫팩 등을 가져간다.
기존에는 쪽방촌 주민들이 후원 물품을 받기 위해 쪽방상담소 앞이나 근처 공원에서 줄을 서야 했다. 오늘처럼 추운 날에는 쉽지 않은 기다림이다.
유 소장은 “예전에는 예를 들어 후원 물품이 100개인데 줄을 선 분이 이보다 많으면 늦게 오신 분은 받지 못해 서로 다툼도 많았다”며 “또 정작 본인한테 필요한 물건도 아닌 데 공짜니까 우선 받아놓고 쓰지 않아 나중에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문제가 생기자 서울시는 후원 물품을 한 곳에 비치하고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냈다. 바로 서울시 자활지원과 이신옥 사무관의 아이디어였다.
이 사무관은 “온기창고는 제가 맡은 쪽방상담소 업무 중 ‘후원 물품 배부 방식을 주민들 자존감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바꿔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며 “여러 곳을 벤치마킹한 뒤 지금의 편의점형 스토어를 생각해 냈고 지금은 잘 정착된 거 같다”고 말했다.
온기창고에 대한 주민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다. 쪽방촌 주민 윤 모(55)씨는 “전에는 바깥에서 줄을 서야 해 창피하기도 했지만 어떤 물건을 주는지 받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며 “여기서는 내가 필요한 물품을 원할 때 가져갈 수 있어 진짜 장을 보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온기창고에서 물품을 구매하는 모습. 손인규 기자 |
온기창고의 또 다른 순기능은 쪽방촌 주민들에게 경제관념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쪽방촌 주민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경제력을 상실한 경제 취약 계층이기도 하다.
유 소장은 “전에는 무턱대고 후원 물품을 받기만 했다면 지금은 자신이 가진 포인트 내에서 주도적으로 비교도 하고 물건을 고르면서 자연스럽게 경제관념을 키우는 연습이 되고 있다”며 “온기창고에 모여 주민들끼리 인사도 하고 정보도 나누는 정말 따뜻한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 되었다”고 말했다.
온기창고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약자와의 동행’의 대표 사업이다. 서울시는 온기창고 외에 동행식당, 동행목욕탕 등을 운영 중이다.
·오세훈 서울시장 돈의동 쪽방촌에서 주민과 면담하고 있다. [서울시 제공] |
특히 온기창고는 지난 2023년 서울시의 창의제안 최우수상과 2024년 중앙우수제안 동상(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온기창고는 현재 동자동과 돈의동 2개소가 운영 중이다. 두 창고의 성공적인 안착으로 올해는 2개가 더 문을 열 예정이다.
이 사무관은 “서울에는 총 5개의 쪽방촌이 있는데 이 중 창신동과 영등포 쪽방촌에 상반기 내 3호, 4호 온기창고가 문을 열 계획”이라며 “현재 동자동과 돈의동에는 매일 각각 200명 넘는 쪽방촌 주민이 찾아오고 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주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서울시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