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빚 갚으려 게임 찾아온 K-모자
8세에 데뷔한 연기신동의 새 변곡점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2’ 박용식 역을 맡은 배우 양동근 [넷플리스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007번이 진짜 타노스였네?” (‘오징어게임’ 시즌2 공개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된 양동근의 래퍼 활동 모습을 본 외국인의 댓글)
느슨하지만 리듬감 실은 말투, 그러면서도 완벽한 딕션, 그루브를 담은 걸음걸이, 찰떡 같이 어울린 녹색 트레이닝복.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집고 용식을 발견한 엄마에게 놀라 나자빠지려는 듯한 엉거주춤한 몸짓과 함께 툭 내뱉는다. “엄마? 엄마가 여기 오면 어떡해?”
소매치기 전과 2범의 고복수(MBC ‘네 멋대로 해라’)였고, 본캐(본 캐릭터)인지 연기인지 알 수 없는 양동근 자신(MBC ‘뉴 논스톱)이었고, 더벅머리로 주먹의 세계를 평정한 최배달(바람의 파이터)이었던 그에게 ‘오징어게임’ 속 용식은 그에게 ‘새로운 물결’이었다.
“새 마음 새 뜻으로, 이 작품을 하는 동안 ‘파티를 즐겨야지’ 하는 마음이었어요.”
어느덧 39년차 연기자가 된 그에겐 요즘 이상한 변화들이 많다. ‘오징어게임’ 출연 이후 많은 사람들이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만한 좋은 말들을 건네니, ‘‘오징어게임’이라는 큰 배에 올라 몇 백년에 한 번 구경할 수 있을까 싶은 큰 파도를 타고 있다‘고 느끼는 그이다. 요즘 그의 SNS엔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로 댓글이 줄줄이 달린다. “엄마 어디 있니?”, “엄마 잘 지켜야 한다”는 과 몰입 전 세계 시청자들의 반응이다. 팔로워도 15만 명이나 늘었다.
덕분에 양동근이 굵직한 선을 하나 그었던 래퍼 YDG의 모습도 소환됐다. 유튜브에선 그의 히트곡 ‘골목길’ 영상에 007번을 확인하는 외국어 댓글이 달렸고, 그가 페노메코와 호흡을 맞춘 곡 ‘볼로’는 공개 1년 6개월이 지나 역주행 중이다. 현재 아이튠즈 영국 캐나다 인도 K-팝 차트 1위, 프랑스 미국 독일 K-팝 차트 상위권에 포진 중이다.
배우 양동근 [넷플릭스 제공] |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양동근은 “‘골든 글로브’는 시즌3까지 기다리라”며 웃었다. 양동근과 만난 이 날은 ‘오징어게임2’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놓친 날이었다.
‘오징어게임2’에서 양동근은 엄마 금자와 함께 생존게임에 뛰어든 용식 역을 맡았다. 산더미처럼 불어난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 게임을 찾아온 용식과 용식의 빚을 갚기 위해 입성한 금자(강애심 분)의 눈물겨운 생존게임이다. 드라마 공개 이후 두 사람은 단숨에 K-모자로 불리게 됐다.
K-모자는 전형적이면서도 전형적이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희생을 보여줄 것 같은 엄마는 애물단지 아들을 한없이 아끼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등짝 스매싱’을 날리는 오지라퍼다. 양동근이 그려가는 용식은 밉지 않은 캐릭터다. 그에게 드리운 딜레마는 일확천금의 꿈을 향한 욕망과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효심 사이에서 나온다. 그는 “애초의 용식은 삶에 찌들어 날카롭고 시니컬한 모습이었는데 엄마와 함께 호흡을 맞추다 보니 조금은 다른 엄마, 다른 아들의 모습이 나왔다”고 했다.
지금의 용식은 양동근 그 자체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동료 배우들은 그에 대해 “본능적으로 캐릭터를 해석할 줄 하는 동물같은 배우”라고 평한다. 그는 모든 공을 엄마 강애심과 황동혁 감독에게 돌렸다.
“무조건 엄마 뒤에 숨자, 엄마만 따라가자는 생각으로 합을 맞췄어요. 거기에 신마다 얹어주는 황동혁 감독님의 기발한 한 스푼의 디렉션 덕분에 만들어진 거예요.” 황 감독의 ‘한 스푼’은 ‘오징어게임’이 일관되게 가져가는 메시지였다.
그의 연기는 40년에 가까운 긴 시간동안 체화해 나온 결과물이다. 1987년, 여덟 살에 드라마 ‘서울 뚝배기’로 데뷔한 어린 양동근에겐 촬영장은 학교이자 놀이터였다. 그는 “내가 온전히 이해해야만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있는 반면, 무엇인지 이해가 안돼도 감독님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에 맞춰 움직이는 배우가 있다”며 “내 경우는 후자였다”고 말한다.
“여덟, 아홉 살에 현장에 갔을 땐 감독님이 오른쪽으로 몇 발, 호흡은 몇 번하라는 디렉션을 줬고, 늘 그것에 맞춰 연기를 했어요. 그 모습이 방송에 나가면 전 연기 잘하는 아이가 돼있었죠. 그 경험이 있으니 디렉션은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게다가 (황 감독님은) 거장이고 천재이며 흥행 보중수표잖아요.”
글로벌 K-모자로 떠오른 ‘오징어게임2’의 양동근 강애심 [넷플릭스 제공] |
배우 인생을 걷는 동안 양동근 앞엔 몇 번의 파고가 있었다. ’네 멋대로 해라‘의 고복수는 그의 인생캐릭터였지만, 동시에 배우 양동근을 내내 쫓아다니는 그림자이자 뛰어넘어야할 과제였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좋은 작품, 인기작에 출연해 유명세를 얻은 것은 “강산이 두 번은 변할 시간인 20년 전의 이야기”라며 웃었다.
“그동안 배우로의 제 삶은 롤러코스터였어요. 인기있는 작품도 남겼지만, 바닥을 쳐 끝까지 떨어졌던 때도 있었죠. 그러다 서른 즈음에 단역부터 차근차근 다시 시작했어요.”
연기에 첫 발을 들이던 그와 지금의 양동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는 “10~40대까지 10년 주기마다 마음가짐도 연기론도 굉장히 달랐다”고 돌아본다.
“10대엔 배우고 묵히고 감을 잡았고, 20대엔 배운 것을 꺼내 소위 말해 ‘빵’ 터졌죠. 그러다 매너리즘이 오고 연예인병도 걸리고 그러다 바닥을 쳤고, 30대엔 작품 안에서 병풍이 됐어요.”
배우 양동근 [넷플릭스 제공] |
주연배우였던 양동근은 조단역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 시기를 스스로 ‘병풍’이라고 했다. 배경처럼 화면 안에 자리하니 다른 풍경이 보였다고 한다. 그는 “낮아지고 가난해진 마음을 견디며 40대를 맞은 지금 전 물감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한다. 튀고 돋보이는 배우가 아닌 하나의 ‘미장센’으로 존재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그는 “감독이라는 위대한 예술가가 그리는 저 그림 안에서 잘 묻어나는 물감이 되고자 한다”며 “빨강이 필요하면 빨강, 파랑이 필요하면 파랑이 되는 배우가 되는 것이 거창하지만 나의 연기론”이라며 웃었다.
‘오징어게임’은 그가 배우 인생에서 마주한, 또 한 번의 변곡점이라 할 만하다. 양동근은 “배우로서 스스로를 뛰어넘고자 발버둥칠 때는 오지 않았던 일이 배우라는 가치관과 직업관을 내려놓고 아빠이자 남편으로 새로운 것에 우선순위를 두자 이런 기회가 왔다”고 했다. 내년이면 어느덧 연기 인생 40년차인 그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러브콜이 늘고 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독인다.
“샴페인을 먼저 따려는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게 다 거품이라고요. 그러니 거품이 다 빠진 뒤 이야기하자고요. 지금은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으리으리한 큰 파도를 타고 있으니, 모든 것이 지나갈 때까지 호흡 관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야 다음이 또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