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와?” 터져버린 눈물…모두가 펑펑 울어버린 그날[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최종장]

[빈센트를 이해하기 위한 작은 책]
138. 반 고흐 3부작 下 : 생레미·오베르 시기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일부 확대), 1890, 캔버스에 유채, 50.2x103cm, 반 고흐 미술관


편집자 주


새해 첫 주부터 3주간은 매주 토요일, 빈센트 반 고흐 이야기를 3부작으로 전합니다. 3년 가까이 연재를 이어가는 <후암동 미술관>의 극장판 형식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빈센트의 삶, 글과 말, 그림과 정신으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최종 장은 1만 2000자가량의 분량을 갖습니다. 읽는 데 빠르면 10분, 여유를 가지면 30~40분 정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구독, 저장, 댓글을 활용한 스크랩 등으로 두고두고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독자분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합니다. 헤럴드경제 홈페이지와 포털에 있는 1부 <“아니, 결코, 절대!” 사랑고백했는데 거절 3연타…삶도, 관계도 서툴렀다>와 2부 <“광기 젖어 귀를 잘랐다니” 충격…경찰까지 출동, 사연 알고봤더니>를 먼저 읽고 오셔도 좋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좋아요’댓글은 콘텐츠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면, 또 한 번 시작합니다.

“빈센트가 스스로에 총을 쐈다”
테오는 그 말에 무작정 내달렸다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의 계단, 1890, 캔버스에 유채, 50×70.5cm, 세인트 루이스 미술관


테오는 미친 사람처럼 달렸습니다.

대체 왜, 도대체 왜. 테오는 입 밖으로도, 마음속으로도 절규했습니다. 무거운 추가 가슴 밑바닥을 긁어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괴로웠어?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이런 일까지 벌일 정도였어?빈센트에게 하고 싶은 말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눈물은 또 용암처럼 차올랐습니다. 턱 밑까지 닿은 숨, 거듭되는 기침은 온몸에 통증을 안겼습니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끅끅 울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테오를 이처럼 미치게 만든 건 짤막한 소식 한 통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빈센트가 스스로 자기 가슴에 총을 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의 집, 1890, 캔버스에 유채, 61x73cm, 톨레도 미술관


테오는 곧장 오베르 행 기차표를 끊었습니다.

역에서 내린 후에는 라부 여관을 향해 줄곧 뛰고, 또 뛰었습니다. 그곳은 혼미한 빈센트가 치료를 받고 있다는 장소였습니다. 이때가 1890년, 7월 28일의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테오에게.

편지와 함께 부쳐준 50프랑 수표는 고맙게 받았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럴 마음이 사라져버렸어. 그렇게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있어. 요즘은 온통 그림에만 관심을 쏟고 있어.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고 존경했던 화가들처럼 잘 그리려고 노력하고 있지.

1890년, 7월 24일. 빈센트가.

테오는 빈센트에게 받은 며칠 전 편지를 떠올렸습니다.

글 속에선 약간의 절망, 적지 않은 허무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무게감을 가진 생의 의지, 예술을 향한 열망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이전에도 편지로 슬픔을 전하는 한편, “나는 시골에서 건강과 기운을 되찾고 있다”는 식으로 상황을 전하곤 했습니다. 테오는 빈센트의 이런 문장 덕에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왜 갑자기…. 테오는 뛰어가는 동안 수없이 다짐했습니다. 이번에는 형이고 뭐고 큰 소리로 화를 내겠다고. 이런 바보짓을 또 벌이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겠다고. 살아만 있다면. 그러니까, 살아만 준다면.

빈센트 반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들라크루아 작품 참고), 1890, 캔버스에 유채, 73x60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빈센트 형!”

테오가 라부 여관 안 다락방을 찾았을 때, 빈센트는 그 안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막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모습이었습니다. “가슴에 총알이 박혀있었어요. 당장 위기는 넘기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지요. 사실… 굳이 따지자면 가망이 없는 쪽에 더 가깝다고 해요.” 테오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테오 씨는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어요.” 라부 여관의 주인장 딸 아델린은, 훗날 이 장면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의 길, 1890, 캔버스에 유채, 73.5×92.5cm, Ateneum


테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 뒤, 어느덧 자신만 바라보는 빈센트에게 다가갔습니다. 세상 모든 걸 다정하게만 본, 그 순하고 큰 눈에는 눈물만 맺혀있었습니다. “형….” 테오는 빈센트에게 윽박지르겠다고 한 다짐을 내려놓았습니다. “괜찮아, 다 괜찮아….” 그저 안아주고, 한없이 토닥이며 위로의 말만 건넬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제는 둘의 고향인 네덜란드어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잠깐의 시간, 그렇게 둘이서만 도란도란.

빈센트 반 고흐, 집과 인물, 1890, 캔버스에 유채, 52×40.5cm, 반스 파운데이션


앞서 2부는 자기 귀를 자른 빈센트가 요양소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환각과 환청을 부르는 발작, 종잡을 수 없이 찾아오는 조울증에 대한 회복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고작 일 년 남짓의 시간 사이 이런 상황에 부닥치고 만 겁니다. 이는 테오조차 충격을 받을 만큼의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대체 왜 그랬을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다행히 정신이 든 빈센트는 끝내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될까요. 이번 글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 3부작 중 최종 장, 마침내 영혼의 화가가 된 빈센트의 생레미와 오베르 시기를 들여다봅니다.

스스로 들어간 요양소에서
‘별 밤’으로 삶을 고백하다


빈센트 반 고흐, 밤의 하얀 집, 1890, 캔버스에 유채, 59×72.5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이날로부터 1년 2개월 전인 1889년, 5월.

빈센트는 생레미에 있는 요양소로 들어갔습니다. 초록빛 옥수수밭이 넓게 깔린 곳이었지요. 다만, 높은 담장 탓에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시설이었습니다. 빈센트는 테오 덕에 빗장 걸린 창문이 있는 방 두 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놓고 한 곳은 침실, 다른 한 곳은 작업실로 꾸밀 수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두 공간을 넘나들며 잠시나마 예측가능한 삶을 살 생각이었습니다. 그사이 심신을 다스릴 마음이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올리브 나무 사이에 있는 하얀 별장, 1889, 캔버스에 유채, 70x60cm, 개인소장


물론, 그때도 빈센트의 눈은 그가 챙겨온 화구 앞에서 가장 반짝였습니다.

빈센트는 창문 틈으로 보이는 깊은 밤을 그리고, 그 위에서 빛나는 달을 그리고, 그 곁에서 흔들리는 별을 그렸습니다. 가끔은 감시인과 함께 짧은 순간 산책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붓꽃과 올리브, 사이프러스 나무 등을 화폭에 담을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빈센트는 이 무렵부터 특유의 요동치는 듯한 묘사에 열중했습니다.

선을 더 진하게, 색을 더 두껍게, 구도를 더 자유롭게 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격정을 억누르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폭발시키기 시작한 겁니다. 본인이 정신질환자임을 오롯이 받아들인 만큼, 더는 보여주기식 절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일부 확대), 1889, 캔버스에 유채, 73x92cm, 뉴욕 현대 미술관


빈센트는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되는 <별이 빛나는 밤> 또한 이곳에서 그렸습니다.

그림 속 눈길을 끄는 건 요동치다 못해 휘몰아치듯 반짝이는 달과 별입니다. 이들이 뿜어내는 빛은 서로 뒤엉킨 채 코발트 블루색 하늘을 물들이고 있지요. 층층이 쌓아올린 물감은 숨이 막힐 만큼의 진한 생동감을 안겨줍니다. 흩뿌려진 섬광은 희망을 말하는 듯하지만, 기다랗게 꼬리를 남기는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울음을 토하는 듯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림은 애틋한 만큼 처연하고, 기운이 강한 만큼 한없이 서글픕니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일부 확대), 1889, 캔버스에 유채, 73x92cm, 뉴욕 현대 미술관


예민한 이라면 예상할 수 있듯, 이 그림은 당시 빈센트의 마음을 비춰주는 창이기도 했습니다.

빈센트는 요양소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해 몸과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평생 괴롭힌 발작은 이곳의 장벽조차 쉽게 넘나들고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애써 모른 척했지만, 악령은 끈질기게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면서 광기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지고 있어.(1889년 5월 25일)”

“정말이지 일이 잘 풀리지 않는구나.”(1889년 8월 말),

“과거 어느 때보다 작업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차 있어.”(1889년 9월 5~6일),

“발작의 고통이 나를 덮칠 때 왈칵 겁이 차올라.”(1889년 9월 7~8일).

빈센트는 테오에게 쓴 편지처럼 때로는 밝은 희망을 품고, 그다음은 떨칠 수 없는 공포와 초조함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빈센트는 그렇게 그림의 빛처럼, 화폭 속 모든 달과 별처럼 매 순간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캔버스에 유채, 73x92cm, 뉴욕 현대 미술관


물론, 빈센트는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이성의 주도권을 놓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살아내겠다는 다짐, 살아보고 싶다는 절규가 한 데 담긴 이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겁니다. 즉, <별이 빛나는 밤>을 단순한 풍경화로 칭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토해낸 처절한 고백이자 투쟁의 산물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영혼의 그림’인 셈이지요.

조카 ‘어린 빈센트’에 환희하고
드디어 유화도 한 점 팔렸지만


빈센트 형에게.

사랑하는 형. 아내가 예쁜 아들을 낳았어. 전에 말한대로 아이는 형의 이름을 따와 빈센트라고 부를 거야. 이 아이 역시 형처럼 강직하고 용감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어.

1890년, 1월 31일. 테오가.

한겨울이 꺾여갈 무렵.

빈센트는 광기와의 거듭된 사투로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발작이 일주일간 이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땐 갑자기 물감을 빨아먹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는 이날 받은 테오의 편지를 열 번, 백 번씩 다시 읽었습니다. 마음 가장 밑부분에서부터 벅찬 마음이 차올랐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꽃피는 아몬드 나무, 1890, 캔버스에 유채, 73.5×92.4cm,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는 다짐했습니다.

이제 막 세상 빛을 본 조카에게 최고의 사랑을 안기기로 거듭 맹세했습니다. 정작 어른 빈센트는 더더욱 비루하고 유약해지고 있지만, 어린 빈센트만큼은 정말 강직하고 용감해지기를 온 힘 다해 기도했습니다. 빈센트는 테오와 요한나 부부를 위해, 그리고 조카를 위해 <꽃 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렸습니다. 이른 봄에 잎을 보이는 아몬드 꽃은 새로운 생명을 상징합니다. 이는 그가 평생 그린 모든 그림 중 가장 밝은 분위기를 품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빈센트 반 고흐, 붉은 포도밭, 1888, 캔버스에 유채, 75x93cm, 푸시킨 미술관


이쯤, 빈센트를 호평하는 이도 하나둘 생겼습니다.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는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글을 공개했습니다. 빈센트에 대한 호의로 가득한 칼럼이었습니다. 빈센트는 드디어 유화도 한 점 팔았습니다. 아를의 풍경이 담긴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 값에 넘어간 겁니다.

테오에게.

네가 보내준 (오리에르의)기사에 깜짝 놀라고 말았어. 내 그림이 그 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단지 그 기사를 통해 내가 앞으로 어떻게 그려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격려가 되는 글이기에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기는 해.

다만, 나의 등이 그 과업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넓지 않다는 건 분명히 밝혀야겠어.

1890년, 2월 2일. 빈센트가.
어머니에게.

저에 대한 기사를 읽었는데, 그것을 보고 좀 놀랐습니다. 기사가 너무 과장된 듯해 유감스러웠지요. (…) 하지만 놀라운 마음이 진정된 지금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 덕에 격려를 받는 느낌도 듭니다.

게다가 (…) 테오가 제 그림이 400프랑에 팔렸다는 소식도 전했습니다. 다른 그림이나 네덜란드 물가를 생각하면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그럴수록 제대로 된 가격에 팔릴 작품을 계속 만들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 생각입니다.

(…) 희망을 품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1890년, 2월 15일. 빈센트 올림.

드디어 낭보(朗報)가 찾아왔지만, 빈센트는 이렇듯 의외로 차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의 글에서는 외려 떨떠름한 감정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이쯤부터 빈센트에게는 성공에 대한 큰 집착이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빈센트는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기에 붓을 들고 있었습니다. 영광을 향한 야망도, 권력과 명예를 떠받치는 세속적 욕망도 사라졌습니다. 빈센트는 이제 찬사와 호평 따위 없어도 살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신과 책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1890, 캔버스에 유채, 92x73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말과 문장보다 경이로운 개념. 쓰고 긋고 칠할수록 더욱더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존재. 창조의 힘. 빈센트는 이것을 위해 남은 삶, 남아있는 영혼을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다만, 빈센트의 뜻과 상관없이 이런 일들은 향후 그에게 좋은 영향을 줄 게 분명했습니다.

“(인상파의 대부)카미유 피사로는 형이 다른 화가들 사이에서 정말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1890년 3월 29일)”

“내게 형 그림 이야기를 하는 미술 애호가가 늘고 있다. 일부러 형 그림에 관심을 두도록 이끌지 않는데도 그렇다.(같은 날)”

테오 또한 이 같은 설렘에 찬 문장으로 기대감을 표했습니다. 그런데….

희망을 송두리째 흔든 발작
요양소도 답이 되지 못했다


빈센트 형에게.

곧 형 건강이 아주 좋아졌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

1890년, 3월 19일. 테오가.
빈센트 형에게.

잘 지내고 있어? 아니면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아 슬픔에 잠겨있어? 낮 동안 무엇을 하면서 살아? 기분 전환을 할 만한 건 있어?

1890년, 3월 29일. 테오가.

(…)

(…)

(…)

빈센트 형에게.

형이 아무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은 걸 알겠어. 페이롱(의사) 씨는 이번 발작이 길기는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했어.

빈센트 형.

형의 그림은 정말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 모네도 형의 그림이 이번 전시에서 최고라고 했어. 아주 많은 화가가 형 이야기를 했어. 사랑하는 형. 형이 빨리 낫기를 매일 기도해.

1890년, 4월 23일. 테오가.
빈센트 반 고흐, 슬퍼하는 노인(영원의 문에서), 1890, 캔버스에 유채, 81x65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희망은 때때로 가장 큰 절망을 안기곤 합니다.

완벽한 희망을 보여준 후 이를 통째로 빼앗아 불태워버려라. 한 사람을 크게 흔드는 방법으로 이런 말이 있기도 하지요. 빈센트 또한 거기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발작은 겨우 고개 든 빈센트를 아예 고꾸라뜨릴 마음인 양 아주 길고, 깊게 찾아왔습니다. 빈센트는 두 달 남짓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겹겹이 쌓인 악몽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곳에선 고래고래 소리치는 일 말곤 무엇도 할 수 없었습니다. 빈센트는 악령과 길고 긴 전투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 이성의 깃발을 다시 쥘 수 있었습니다.

테오에게.

내 작업은 정말 잘 되고 있었어. 너도 그 그림을 보면 내가 지금까지 그린 작품 중 최고임을 알 거야. 그간 그린 것 중 가장 끈기 있게 작업했어. 아주 차분하고, 붓질도 안정적이었지.

하지만 그다음 날 바로 짐승처럼 발작을 일으켰어. 왜 그랬는지 나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그렇게 돼버렸어.

1890년, 4월 말. 빈센트가.

두 달여 이어진 발작은 무엇보다도 빈센트 본인에게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정신이 든 그는 이곳에 틀어박혀있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에 더욱 확신을 가졌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죄수들의 운동, 1890, 캔버스에 유채, 80x64cm, 푸시킨 미술관


“얼마나 더 많은 슬픔과 불행을 겪어야 할지 알 수 없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1년을 넘도록 참았지만 (…)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

빈센트는 이런 식의 글도 썼습니다.

빈센트는 또 자기만의 생각에 천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단 일 초도 이곳에 더 있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서둘러 내렸습니다. 급기야 테오에게 “제발 의사에게 ‘형을 퇴소시켜 달라’고 말해달라”며 고집도 피웠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두 어린이, 1890, 캔버스에 유채, 51.5×46.5cm, 개인소장


빈센트도 무턱대고 떼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마지막 꿈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소중해 꺼내놓지 않은, 짓이겨진 수많은 꿈 틈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것은 테오와 다시 함께 사는 일이었습니다.

빈센트는 테오만 곁에 있다면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가장 고결한 사랑만 있다면, 이를 연료 삼아 위대한 창조의 여정을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사랑을 사랑했던 빈센트는 이번에도, 이번 또한 진심이었습니다. 빈센트는 우여곡절 끝에 요양소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보낸 기간은 1년쯤이었습니다.

새삼스럽게 바라본 테오는
빈센트만큼이나 아파보였다


빈센트 반 고흐, 산책하는 연인과 초승달이 있는 풍경, 1890, 캔버스에 유채, 49.5×45.5cm, 상파울루 미술관


“테오야! 테….”

1890년, 여름 초입부의 어느 날. 빈센트는 파리로 왔습니다. 테오가 리옹역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테오의 실루엣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테오가 이렇게까지 야위었던가.

빈센트는 멍하니 서있는 테오를 보고 멈칫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빈센트가 테오를 이렇게까지 유심히 살펴본 건 오랜만이었습니다. 테오는 더는 예전의 테오처럼 보이질 않았습니다. 눈 밑 그늘은 볼 아래까지 떨어졌고, 축 처진 어깨는 그대로 흘러내릴 듯했습니다. 그것은 새삼스럽지만 확실한 변화였습니다. 사실 그 시절에는 테오도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테오는 예전부터 매독을 앓고 있었습니다. 여러 스트레스로 인해 병의 진전도 빨랐습니다. 우울증 또한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걷는 연인이 있는 덤불, 1890, 캔버스에 유채, 50×100.5cm, 신시내티 미술관


“빈센트 형. 잘 왔어. 거기서 왜 물끄러미 서있어?”

“테오야. 보고 싶었다. 그런데, 네 얼굴이….”

빈센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도 알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이 지경까지 온 것에는, 매독만큼이나 본인 탓이 크다는 것을요. 미안함은 열병처럼 밀려왔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82x114cm,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둘은 곧장 테오의 아파트로 갔습니다.

빈센트는 식탁 위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고, 안방에서는 그가 수없이 부쳤던 아를의 풍경화를 보고, 거실에서 <별이 빛나는 밤>을 봤습니다. 서글픔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놈의 팔리지도 않는 그림으로 집을 장식해 둔 데 대해 죄의식까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테오 부부의 아기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였습니다.

보는 순간 눈물이 차오를 만큼 찬란한 생명체였습니다. 하지만, 빈센트는 그런 어린 빈센트 앞에서도 뜻밖의 좌절감과 마주했습니다. 아빠 테오와 엄마 요한나, 그리고 아들. 빈센트는 그 어느 틈에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빈센트는 그가 가정의 평화를 깨는 불청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지요. “(발작 와중에도)지금껏 다른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다”며 장담해왔지만, 그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습니다. 테오 부부는 빈센트를 최대한 배려했습니다. 다만, 이들 또한 불안한 기색만큼은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오렌지와 아기, 1890, 캔버스에 유채, 50x51cm


빈센트는 테오 부부의 아파트를 거점으로 둔 채 파리 생활에 나설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테오와의 충돌은 점점 더 잦아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린 빈센트에게도 묵직한 병이 찾아왔습니다. 형제 사이에는 언젠가부터 지뢰가 가득 깔려 있었습니다. 6월 말, 결국 둘은 돈 문제로 크게 다투고 맙니다. 뿌리 깊은 우애가 화해를 이끌어왔지만, 이런 일은 앞으로 더 잦아질 게 분명했습니다. 빈센트는 더는 이곳에 머물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습니다. 빈센트는 얼마 후 어머니에게 편지를 씁니다. “어머니. 저는 계속 고독하게 살아가겠지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망원경으로 희미하게 보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보여요.”

마지막 정착지 오베르서
새로운 우정을 마주한 그


빈센트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화, 1890, 캔버스에 유채, 67x56cm, 개인소장


빈센트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다시 찾았습니다.

이곳은 그가 요양소에서 퇴소한 후 파리를 찾기 전 잠시 머문 땅이었습니다. 파리에서 약 30㎞가량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지요. 탁 트인 밀밭과 알록달록한 과일나무, 작은 나무집과 소소한 교회를 볼 수 있는 동네였습니다. 빈센트는 당분간 이 도시에 뿌리를 내릴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빈센트가 오베르를 둥지로 택한 데는 결정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폴 가셰의 존재였습니다.

가셰는 오베르에 거처를 둔 의사였습니다. 우울증에 대한 논문을 쓴 적 있고, 여러 정신병원을 돌며 일한 경력도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마추어 화가를 자처할 만큼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였을까요. 그는 피사로는 물론 마네와 르누아르, 세잔 등을 환자로 둔 적도 있었습니다. 빈센트의 주치의로 나서기에 여러모로 적임자였던 겁니다.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의 풍경, 1890, 캔버스에 유채, 50x52cm, 반 고흐 미술관


테오에게.

가셰 박사는 어딘가 아파 보여. 나이는 많은데, 몇 년 전에는 아내를 잃었다고 했어. 그는 (이런 불행 속에서도)본인이 의사고, 일과 신념이 있어 잘 버티고 있는 듯해. 우리는 쉽게 친해졌어.

1890년, 6월 4일. 빈센트가.“

빈센트의 이 편지에서는 가셰에 대한 각별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야말로 불행한 사람을 가장 빨리 알아볼 수 있다는 말처럼, 둘은 서로를 마주한 순간부터 알 수 있었습니다. 과장된 웃음소리, 애써 밝은 척하는 얼굴, 억지로 내보이는 제스처…. 빈센트는 가셰에게서 뿌리 깊은 우울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가셰 또한 빈센트에게서 다른 환자들에게는 없던, 바위처럼 단단한 슬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도비니의 정원, 1890, 캔버스에 유채, 53x103cm, 히로시마 미술관


둘은 의사와 환자 이상의 우정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빈센트가 가셰의 초상화를 연달아 두 점이나 그려주기도 하지요. 빈센트는 가셰에 대해 이런 글도 씁니다. “나는 형제 같은 진정한 친구를 찾았다. 나와 가셰 박사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도 닮아있었다.”

오직 그림, 오로지 예술
마지막 밧줄처럼 매달리다


빈센트 반 고흐, 휴식(밀레의 작품 참고), 1890, 캔버스에 유채, 73x91cm, 오르세 미술관


빈센트는 이곳에서 조용히, 그리고 처절히 삶을 다시 꾸렸습니다.

빈센트가 머문 곳은 라부 여관이었습니다. 이는 오베르 시청 길 건너편에 있는 작은 시설이었습니다. 이 건물의 낡은 계단을 몇 개 타고 올라가면 볼 수 있는 5번 다락방, 두 평 남짓의 그 공간을 안식처로 삼았습니다.

빈센트는 그곳에서 그림에 대한 마음을 불태웠습니다.

그림, 예술만이 생명의 마지막 밧줄이라고 생각한 듯 매달렸습니다. 가셰와 가셰의 딸을 그렸습니다. 시청과 교회를 그리고, 라부 여관과 그곳 주인장의 열두 살 소녀를 그렸습니다. 노을과 밀밭, 추수하는 사람들을 지긋이 그렸습니다. 그렇게 오베르에 머문 2개월 가량에만 그림을 80여점이나 만들었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하루에 한 점 이상씩 작품을 내놓은 겁니다. 이렇듯 더는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의 열정을 꽃피웠습니다. 이대로만 가면, 그간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성취를 이룰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 1890, 캔버스에 유채, 72×90.5cm, 푸시킨 미술관


빈센트는 몰랐을 테지요.

원래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 바다가 가장 고요하다는 점을요.

너무도 소중했던 마지막 꿈
알고 있었지만, 못 박힌 말들


빈센트 반 고흐, 하얀 옷을 입은 소녀, 1890, 캔버스에 유채, 66.7×45.8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런던 시절 하숙집 딸 로예, 에텐에서 짝사랑한 사촌 케이, 헤이그에서 만나 동거했던 시엔….

빈센트는 종종 이들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한 번도 사랑의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빈센트는 이 여인들을 삶의 공동 주연으로 삼고 싶었지만, 모두가 단역을 자처한 채 떠났습니다. “…빈센트, 제발!” 빈센트는 고갱이 버럭 소리치던 장면도 회상했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꿈꾼 화가 공동체 또한 꾸리지 못했습니다. 고갱뿐 아닌 누구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예술. 평생을 쏟은 예술 또한 만족할 결과물로 빚어내지 못했습니다. 빈센트는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도 여전히 빈 캔버스가 두려웠습니다. 붓을 든 채 덜덜 떨기 일쑤였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눈 쌓인 들판, 1890, 72x82cm, 반 고흐 미술관


예술가는 고통을 삼키며 성장한다는 말이 있지요.

불운을 겪지 않고선 무엇 하나 제대로 쓰지도, 그리지도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다시 고뇌와 슬픔이 찾아오면 외려 감사해야 한다는 글귀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가 돼도 이런 고고한 말만 읊을 수 있을까요.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 고통을 통해서만 지혜에 도달해야 하는 건지, 더는 원하지 않는데도 왜 더 성장해야 하는 건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빈센트가 그런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또 한 번 집착하듯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제 그가 절박하게 찾아 헤매는 건 화목과 안정이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출근하는 농부 부부, 1890, 캔버스에 유채, 73x92cm, 에르미타주 미술관


빈센트는 테오 가족이 오베르로 오기를 바랐습니다.

한 지붕 또는 이웃집에 살고, 따뜻한 저녁밥이나 나눠 먹을 수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빈센트의 마음은 그의 그림에 그대로 묻어있습니다. 그는 오베르의 풍경을 보다 평화롭게, 한 층 더 서정적으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테오가 관리하게 될 이 작품들은, ‘오베르는 아기와 함께 살기 좋은 곳’이라는 식의 느낌을 한껏 품고 있었습니다.

테오는 빈센트를 사랑했습니다. 지금껏 변함없이 사랑했고, 앞으로도 흔들림 없이 사랑할 마음이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첫 걸음마(밀레의 작품을 참고), 1890, 캔버스에 유채, 72.4×91.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하지만 테오는 빈센트의 바람에 응할 수 없었습니다.

테오에게는 그만의 일이 있었고, 그만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건강은 더더욱 악화하고, 사회생활 또한 녹록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테오는 빈센트가 은근히 내비치는 기대에 대해 이런 편지를 씁니다. “(…)형이 가정을 꾸리기를 나도 진심으로 바랄게.” 형이 무슨 마음인지 알겠지만, 이는 이뤄질 수 없는 염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겁니다.

테오에게.

네가 나를 부담스러운 존재로 느낄까 두려웠어. 하지만 (…)네가 내 입장 또한 아주 힘겹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종종 조카를 생각해. 아이를 기르는 일 말이야. 그림을 그리느라 온 신경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보다는 분명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나.

하지만 나는 너무 늙어버렸어. 새 출발을 한다거나 다른 어떤 걸 바랄 수가 없어. 그런 희망은 나를 떠난 지 오래야.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만 남겨둔 채로.

1890년, 7월. 빈센트가.

빈센트는 결국 테오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빈센트의 편지를 보면, 그가 울컥하는 감정을 꾹 누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지만, 더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피아노를 치는 마그리트 가셰, 1890, 캔버스에 유채, 102.5x50cm, 바젤 시립 미술관


빈센트는 이 무렵 가셰와도 서먹해지고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가셰의 집을 찾았습니다. 노트를 든 가셰가 빈센트의 상태를 살폈습니다. 그러는 동안 빈센트는 지난 시간 사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얘기했습니다.

둘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로감을 느꼈습니다.

빈센트는 함께 있기에 너무 낭만성이 짙은 이였고, 가셰는 같이 무언가를 하기에 무척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가셰 입장에선 빈센트가 자기 딸 마그리트에게 호의를 보이는 점 또한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오베르의 풍경. [이원율 기자]


빈센트는 거리를 뚜벅뚜벅 걸었습니다.

카페에서 빵과 우유, 치즈를 꺼내 먹었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와 광장을 돌고, 시장을 살펴보고, 밀밭으로 넘어갔습니다. 캔버스를 이젤 위로 올렸습니다. 그동안 누구도 빈센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외려 그의 흉진 얼굴, 남루한 복장을 보고 슬금슬금 피하기 일쑤였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 캔버스에 유채, 50.2x103cm,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 앞에 펼쳐진 밀밭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팔팔한 늑대 무리가 뛰어다니는 듯 쉼 없이 산들거렸습니다. 순간, 수십 마리 까마귀가 날아 올랐습니다. 아, 아…. 빈센트는 붓을 떨어뜨린 채 작게 신음했습니다. 갈라진 목소리 틈으로 단내가 피어올랐습니다. 노란색 물감에 흠뻑 젖은 붓은, 그대로 들판 위를 뒹굴며 대지에 색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요동치는 생명의 경이, 턱 밑까지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 빈센트가 이날 무엇을 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건, 빈센트가 이 순간에도 그의 영혼을 떼어내 그림을 그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탄생했습니다.

누가 빈센트에게 총을 쏘았나
“의심 말라” 빈센트는 말했다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의 평원, 1890, 캔버스에 유채, 73.5x92cm, 노이에 피나코텍


탕.

1890년, 7월 27일. 오베르의 한 들판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도 따라왔습니다. 얼마 후, 다시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누군가가 들판 한가운데에서 비틀대며 일어섰습니다. 빈센트였습니다.

빈센트는 피를 쏟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라부 여관까지는 거리만 1㎞였습니다. 그곳까지 닿았을 때, 그의 몸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이를 본 라부 여관의 사람들이 곧장 의사를 불렀습니다. 가셰가 또 다른 의사 한 명과 함께 황급히 달려왔습니다. 총알은 빈센트의 척추에 걸린 채 고통을 뽑아내고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의 집, 1890, 캔버스에 유채, 19.1×24.7mm, 필립스 컬렉션


“빈센트!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발 말 좀 해보게.”

빈센트는 사람들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질 않았습니다. 달려온 경찰에게는 “다른 사람을 의심할 건 없다”는 식의 말만 했습니다.

빈센트가 찾는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나와 달리 부모에게 한 번의 실망감도 준 적 없는 아들, 나와 달리 어릴 적부터 늘 사랑스러웠던 아이, 나와 달리 유능함과 단호함을 함께 타고난 동생…. 원한다면 내 영혼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존재, 테오였습니다.

오베르의 풍경. [이원율 기자]


“빈센트 형!”

테오가 문을 강하게 밀치고 들어왔습니다. 테오는 이제 그의 형만큼이나 아파보였습니다. 빈센트는 그 모습에 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테오 또한 죄책감에 짓이겨져 있었습니다. 빈센트와 티격태격했던 모든 순간을 후회했습니다.

일과 가족 사정 탓이기는 했지만, 다음 날이면 둘 다 펑펑 울며 사과를 주고받았지만, 그래도… 테오는 빈센트 앞에서 고개를 떨궜습니다. 테오는 빈센트에게 모든 게 다 좋아질 것이라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빈센트는 여기에 대고 모든 게 다 미안하고, 미안했다는 말만 되풀이할 모습이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아델린 라부의 초상화, 1890, 캔버스에 유채, 67x55cm, 개인소장


사실, 빈센트의 이번 총 사건을 놓곤 일각에서 여러 추측을 표하기도 합니다.

무게추는 빈센트 스스로 이 일을 벌였다는 쪽으로 더 크게 기울어져 있지요. 터널 속 광차처럼 불안정한 정신, 좀처럼 나아지지 않을 듯한 미래, 무엇보다도 테오에 대한 죄책감 등이 죽음을 택하게 했다는 분석입니다. “빈센트. 아직 살 가능성은 있어.” 가셰가 이렇게 말하자, 빈센트는 “그렇다면 제가 이 짓을 또 해야 하는군요”라고 말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당시 현장에 있던 아델린의 회상이기도 합니다.

다만, 혹자는 동네 불량배의 소행이었다는 주장도 합니다.

빈센트를 줄곧 괴롭혀온 불량배 무리가 그에게 실수로 총을 쏘고 말았다는 게 핵심입니다. 빈센트는 “내가 했다”는 식의 말을 했지만, 이 또한 문제의 불량배를 배려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설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잘 됐다는 마음으로요.

그의 고통은 왜 영원했는가
이제야 별이, 별이 빛나는 밤에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의 교회, 1890, 캔버스에 유채, 94x74cm, 오르세 미술관


테오와의 짧은 대화를 마친 빈센트는 다시 표정을 일그러뜨렸습니다.

빈센트는 배를 움켜잡았습니다. 상처는 어느새 잔뜩 부어 있었습니다. 벌어진 틈으로 또 다른 세균 감염이 이뤄진 겁니다. 빈센트는 급격히 창백해졌습니다. 다음 날 떠오를 해를 볼 가망이 없었습니다. 테오는 누워있는 빈센트의 머리를 감싸안았습니다. 빈센트는 그제야 울먹이며 “왜, 왜 나에게만 슬픔이 계속됐던 거야?”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빈센트가 죽기 직전 유언으로 남겼다는 말은 재차 한숨을 내쉬게 합니다. “고통은… 영원하구나(The sadness will last forever).”

빈센트 반 고흐


1890년, 7월 29일.

빈센트는 그날 새벽 1시30분께 영영 눈을 감았습니다. 테오에게 안긴 채였습니다. 죽은 빈센트와 흐느끼는 테오를 떼어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당시 빈센트의 나이는 서른일곱 살이었습니다. 빈센트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들판과 가까운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작은 비석이 사실상 전부였습니다. 당연히, 그 어떤 특별 대우도 없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잠든 곳 [이원율 기자]


장례식도 조촐했습니다.

테오 부부는 흰 천에 덮인 관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습니다. 관 주변에는 해바라기와 노란색 달리아 꽃 몇 송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에밀 베르나르, 샤를 라발, 카미유 피사로의 아들 뤼시앵 피사로 등 몇몇 화가들이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탕기 영감은 하도 울어 코가 빨개진 채 훌쩍였습니다. 빈센트의 관이 땅에 내려지기 전, 가셰가 그의 굴곡진 삶을 읊었습니다. “빈센트는…. 큰 꿈을 가진 정직하고 훌륭한 화가였습니다.” 가셰 또한 너무 많이 울먹인 탓에 이를 끝까지 읽지 못했다고 합니다.

테오에게.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다 쓸데없는 일이라는 느낌이 드는구나. (…) 그래, 내 그림들 말이야. 나는 그것을 위해 내 생명을 걸었어. 이 때문에 내 이성은 반쯤은 망가져 버렸지. 그런 건 상관없단다.

1890년, 7월. 빈센트가.

이는 빈센트가 사망할 당시 품에 안고 있던 편지였습니다. 글이 무척 우울해 끝내 부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광기와 격정, 울분과 슬픔에 찬 한 사람의 일생은 짙은 여운을 남긴 채 끝을 맺었습니다.

테오는 그해 8월, 빈센트의 그림 350점을 전시하는 회고전을 열었습니다. 1892년에는 네덜란드의 대형 화랑이 빈센트와 그 그림들을 소개했고, 1905년에는 스데델리크 미술관에서 빈센트의 작품 484점을 전시하는 대규모 행사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야 빈센트의 진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림에 대한 극찬도 뒤늦게 이어졌습니다. 그의 삶을 다룬 책과 영화, 음악과 연극까지 연달아 만들어졌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잠든 곳. [이원율 기자]


“이 남자는 광인이 되거나, 시대를 앞서가게 될 것이다.”

인상파의 대부 피사로는 언젠가 빈센트를 놓고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당시 빈센트의 지인들은 그가 결국 광인의 길을 택하고 스러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다만, 지금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가 테오의 말처럼 매 순간 강직하고, 용감했다는 것. 누구도 가지 않은 길, 누군가는 가야 했던 그 길 위에서 일생을 다 바쳤다는 것을요. 그가 시대를 앞서간,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예술 영역을 개척한, 그런 위대한 인간이라는 점을요.

빈센트 반 고흐와 테오 반 고흐가 잠든 곳. [이원율 기자]


빈센트의 긴 여정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미국 가수 돈 맥클린의 1971년 곡 ‘빈센트(Vincent)’의 가사 일부를 소개하며 끝인사를 드립니다. 이는 뒤늦게 빛을 본 빈센트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빈센트가 생전에는 듣지 못했던, 너무도 듣고 싶었던 말로 채워진 추모곡입니다.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starry, starry night

이제야 저는 깨달았어요 당신이 저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맑은 정신을 가지기 위해 얼마나 아팠을지 그들을 놓아주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지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죠 듣는 법도 몰랐죠 아마 지금쯤은 귀를 기울이겠네요 별이, 별이 빛나는 밤에

돈 맥클린, 빈센트 中
에필로그


테오는 빈센트가 죽은 후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그는 1891년 1월 25일에 사망했다. 빈센트의 장례식이 치러진 후 고작 6개월 가량이 흐른 후였다.

◎테오는 먼저 간 빈센트 옆에 묻혔다.

◎남겨진 테오의 아내 요한나는 빈센트의 남아있는 그림,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 등을 정리해 세상에 알렸다. 이는 빈센트가 재평가를 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빈센트가 사랑한 그의 조카 어린 빈센트는 훗날 반 고흐 미술관을 세웠다.

◎빈센트가 한때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한 여인 시엔은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파리 시절 빈센트의 조력자였던 탕기 영감은 1894년에 사망했다.

◎아를 시절 빈센트의 친구였던 조셉 룰랭은 그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들은 후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03년에 사망했다.

◎오베르 시절 빈센트의 주치의였던 폴 가셰는 1909년에 사망했다.

◎빈센트가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은 1990년 8250만 달러(수수료 포함·당시 약 900억원)에 낙찰됐다. 이는 빈센트 사후 100년이 된 해에 이뤄진 일이었다.

폴 고갱은 1903년에 사망했다.

크레딧


<참고 자료>

러빙 빈센트, 도로타 코비엘라, 휴 웰치맨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예담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위즈덤하우스

빈센트, 나의 빈센트, 정여울, 21세기북스

빈센트 반 고흐, 인고 발터, 마로니에북스

반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32가지, 최연욱, 소울메이트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어빙 스톤, 청미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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