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에 자리가 없는데”…갈곳 잃은 한글박물관 유물

국내 주요 박물관 수장고 포화율 100% 근접
큰 화재에 유물 이전 필요 불구 맡길 곳 없어
수장고 확장 필요한데도 우선 순위에서 밀려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에서 불이 나자 소방관들이 건물 옥상에서 화재 진압을 시도하고 있다. 용산구청과 소방당국에 따르면 화재는 박물관 옥상에서 발생했다. [연합]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지난 1일 화마(火魔)에 휩싸였던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의 소장품 관리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박물관 건물 화재로 소장품들을 다른 박물관의 수장고로 옮겨야 하는데, 대부분 수장고가 거의 찬데다 이를 전문적으로 처리할 인력도 마땅치 않은 것.

그간 수장고 및 문화유산 관리인력 확대 필요성에 대한 박물관계의 주장이 있었지만, 정책 우선 순위에서 밀리며 차일피일 미뤄진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번 한글박물관 화재로 인해 협소한 박물관 수장고 능력과 보존처리와 같은 담당 인력 부족 등 정부의 문화유산 관리에 대한 고질적인 문제가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3일 헤럴드경제 취재를 종합하면,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한 유물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옮기겠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모두 이전이 가능할 지 여부에 대해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8만 여점에 이르는 문화유산을 장기 보관할 새로운 공간이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마땅치가 않기 때문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이 수장고에 보관 중인 소장 자료는 현재 8만9000여점. 수장고 면적 내 최대 수용량이 8만3296점임을 고려하면 수장률은 100%를 초과한 셈이다. 이에 따라 국립한글박물관은 지난해부터 국립민속박물관 제5수장고를 임시 수장고로 대여해 사용해야 했고, 소장자료 9000여점이 국립민속박물관 임차 수장고에 보관 중인 상태다.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에서 불이 나 관계자들이 수장고에서 꺼낸 문화유산을 이송하고 있다. [연합]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에서 불이 나 관계자들이 수장고에서 꺼낸 문화유산을 이송하고 있다. [연합]


문제는 이번 화재로 이전이 필요한 나머지 8만 여점 유물을 보관하기 위한 ‘묘수’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품 이전을 결정한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2025년 1월 현재 수장고 포화율은 89.2%에 이른다. 51만 여점의 유물 보관이 가능한데, 이중 49만 여점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목재·복합·금속 등 속성이 다른 9만 여점의 국립한글박물관 소장품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자리가 부족할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국립한글박물관의 소장품이 보통 지류 형태가 많기 때문에 단순히 중앙박물관의 수장고 포화율만 보고 한글박물관의 소장품 보관 가능 여부를 판단하기 힘들다”면서 “소장품의 형태별 보관 방식 및 기간 등을 모두 따져봐야 구체적으로 수용 가능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국립한글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보관 기간, 형태별 이동 방법 등을 두고 여러가지 패키징(포장) 작업을 논의하고 있는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익명을 요청한 한 박물관 관계자는 “당장 8만 여점에 달하는 소장품 이송만 두고도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은 건 사실”이라고 전했다.

설상가상으로 소장품에 대한 국립한글박물관의 보존처리 담당 정규직 인력은 단 1명에 불과한 것도 문제다. 그간 국립한글박물관은 보존처리 업무를 별도의 독립 부서 없이 전시운영과 내 ‘자료 관리’ 업무에 편제해 운영해왔다. 이는 지류·목재·복합·금속·석재·유리 등 재질과 특성이 다른 소장품을 한 사람이 총괄해 운영해왔다는 의미다. 상태조사, 보존처리, 훈증처리, 재질분석, 보존환경 관리 등으로 세부적으로 나뉘는 보존처리 관리 업무 역시 이 담당자가 혼자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 5년 사이 타자기와 같은 복합 재질 소장품이 크게 늘면서 2014년 설립 당시에만 해도 지류 소장품이 다수를 차지했던 국립한글박물관의 소장품의 재질도 다양화되는 추세다. 이처럼 다양한 특성을 지닌 자료와 문화유산을 과학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선 관련 조직과 함께 인원 확충이 필요한데도 우선 순위에 밀려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에서 불이 나 소방관들이 건물로 진입하고 있다. [연합]


이에 대해 국립한글박물관 측은 “사나흘 내에 소장품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1개월내 이동시키는 소산 계획을 수립하겠다”면서도 “다만 8만 여점의 소장품을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는데 것과 관련해 아직은 잠정적인 계획인 상태”이라고 말을 아꼈다. 소장품 관리와 관련해선 “비상사태인 만큼 박물관 인력 모두가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대처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국립한글박물관은 화재 발생 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월인석보 권9, 10’, ‘정조 한글어찰첩’, ‘청구영언’등 보물 9건과 ‘삼강행실도(언해)’ 등 시도유형문화유산 4건을 포함, 주요 유물 257점을 인근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옮겼다. 4일에는 소방당국과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현장 감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오는 10월 예정된 박물관 재개관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이번 화재로 정부는 오는 5일부터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 등 미술관·박물관·공연장 등 공사 중인 다중이용시설 현장 13개소에 대해 특별 안전 점검을 시작할 예정이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갑작스러운 화재 소식으로 국민 여러분께 참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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