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웃는 인생사 살다간 국민가수
고인 빈소에 동료, 선후배 발길
태진아 “라이벌 디너쇼 계획했는데…”
박지원 의원 “어려울 때마다 도움 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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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송대관의 빈소가 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9일 오전 11시,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다. [사진공동취재단]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해뜰날’ 중)
맨주먹 불끈 쥐고 노력만 한다면 ‘해뜰날’이 올 거라 했던 국민가수였다. 오랜 무명의 설움도 ‘긍정 마인드’로 이겨낸 그의 노래에 전 국민의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다 비켜났다. 그렇게 ‘쨍하고 해뜰날’이 그에게도 국민에게도 왔다. ‘한 구절 한 고비 꺾어 넘을 때’마다 ‘쿵짝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맞춰보며 ‘울고 웃는 인생사’, ‘소설 같은 세상사’라며 웃어 넘겼다. 78년의 삶을 뒤로 하고 갑작스럽게 별세한 송대관의 생은 고비고비 웃음과 눈물로 아로새겨졌다.
고인이 태어난 전북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고장이었다. 1946년 이곳에서 태어난 고인의 조부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전북 만세 우동에 참여한 송영근 선생이다. 지난해 8월 MBC ‘손태진의 트로트 라디오’에 출연한 그는 “할아버지가 겪은 고문과 고통은 정말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나 할아버지의 업적으로 대한민국이 해방된 것이어서 정말 자부심을 느낀다”며 “할아버지께서 군산의 형무소에서 많은 고문을 당하다 세상을 떠나셨다. 손자의 입장에 굉장히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가수로 데뷔한 것은 1967년이었다. ‘인정많은 아저씨’로 첫 발을 디뎠던 꿈많은 소년 송대관은 그 시절 당대 최고의 스타인 남진 나훈아의 빛에 가려 오랜 무명시절을 보냈다. 고인을 인기가수 반열에 올린 노래가 바로 ‘해뜰날’이었다. 1975년 발표한 이 곡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고인은 이듬해 방송3사에서 가요대상 트로피를 수집했다.
‘해뜰날’로 좋은 날이 왔지만, 당시 가수들의 주무대였던 극장쇼가 사양길에 접어들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고인은 10여년 만인 1989년 ‘정 때문에’를 들고 돌아와 재기에 성공했다. 1990년대는 고인의 전성시대였다. 중견가수의 입지가 좁아지고 발라드와 댄스 음악 전성시대가 열리던 때에도 소인은 ‘차표 한장’, ‘네 박자’ 등으로 인기를 얻으며 현철 태진아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대천왕’으로 군림하며 국민을 위로했다. 트로트 장르의 확장과 저변 확대에 기여한 가수다.
2010년대에 접어들어 고인은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2013년 아내가 충남 보령시 일대를 개발한다며 투자금 명목으로 피해자의 돈을 가로챈 혐의로 기소돼 유죄가 인정됐다. 당시 함께 기소됐던 송대관은 2015년 11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으나, 아내의 대출에 연대 보증을 서며 빚더미에 앉았다. 2021년 12월 방송된 MBN ‘현장르포 특종세상 스타멘터리’에 출연했을 당시 그는 “빚이 280억까지 생겨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개인 회생 절차를 밟았지만 수백원에 이르는 부채를 모두 해결하진 못했다”며 “지금도 빚을 갚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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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송대관씨와 절친했던 가수 태진아씨와 가수협회장 이자연씨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빈소 입구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연합] |
영광스런 날도 길었고, 아픈 날도 있었지만 고인은 언제나 국민을 위로한 서민가수였고, 선후배 가수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선 제2대 대한가수협회장이었다. 회장직을 수행하던 2009년엔 일본 노래방에서 한국 가요가 무단으로 사용된 점을 지적, 현지 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2001년엔 옥관문화훈장도 수훈한 국민가수였다.
고인이 떠나는 길은 무수히 많은 동료, 선후배 가수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빈소엔 가왕 조용필을 비롯해 임영웅, 작곡가 박현진, 방송인 김구라의 조화가 마련됐다.
고인과 오랜 라이벌이었고, 절친한 동료였던 태진아는 이날 빈소를 차자 “한쪽 날개를 잃은 기분이다. 이젠 방송에 나가 ‘송대관 보고 있나’라는 이야기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슬픔을 삼켰다. 두 사람은 지난달 새해 인사를 나눈 것이 마지막 통화였다. 그는 “전화로 오랜만에 ‘라이벌 디너쇼’를 잡아보자고 이야기했다.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앞이 보이지 않고 할 말을 잃었다”고 말했다.
이자연 대한가수협회장은 “‘네박자’가 나왔을 때 제목을 못 정했다고 하시기에 ‘쿵짝’보다는 ‘네박자’가 낫다고 조언을 드렸다. 그 노래가 많은 사랑을 받아 행복했다”며 “많은 분들이 ‘해뜰날’ 노래에 의지하고 기대며 꿈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선배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저희도 잊지 않겠다”고 추모했다.
가수 강진은 “송대관 선배는 이웃집 형님처럼 편하고 친근한 가수였다”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믿기지 않아 달려왔는데 이제 아프지 마시고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박지원 의원도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박 의원은 고인이 1980년대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그는 “송대관 씨는 저와 형제처럼 지내며 제가 어려울 때, 필요할 때 늘 도움을 줬다”며 “훌륭한 가수가 너무 빨리 가서 애석함이 끝이 없다. 좋은 나라로 가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족에 따르면 송대관은 전날 컨디션 난조를 호소, 급히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찾았으나 치료 도중 6일 오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으로는 배우자와 두 아들이 있다. 영결식은 오는 9일 오전 9시 30분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이날 오전 11시,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