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미 소프틀리’ 가수 로버타 플랙 88세로 별세

그래미상 5회 수상, 1970년대 풍미한 스타

인종차별, 불평등, 성소수자 문제에도 관심

 

로버타 플랙의 2005년 공연 모습. [AFP]

[헤럴드경제=한지숙 기자] ‘킬링 미 소프틀리 위드 히스 송’(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미국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로버타 플랙이 24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88세.

이날 로이터, AP통신 등에 따르면 플랙의 홍보 담당자인 일레인 쇼크는 성명을 내 플랙이 뉴욕 맨해튼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인 것으로 전해졌다.

1974년 3월 4일 그래미 시상식에서 로버타 플랙이 ‘킬링 미 소프틀리 위드 히스 송’으로 ‘올해의 레코드상’을 수상한 뒤 발언하고 있다. [AP]

플랙은 2022년 근위축성 측상경화증(ALS·루게릭병)을 앓고 있어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다고 발표한 바 있다.

고인은 그래미 상을 2020년 평생공로상을 포함해 5차례 수상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특히 1973년과 1974년 2년 연속으로 그래미상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하며 1970년대를 풍미했다.

NYT는 “로버타 플랙은 솔과 재즈, 포크의 친근한 조화를 통해 1970년대 가장 인기 있는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한 매력적인 가수이자 피아니스트였다”고 평가했다.

1937년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플랙은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피아노와 가스펠을 배웠다. 교회 오르간 연주자인 어머니의 권유로 배운 피아노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15세 때 흑인들의 명문대로 유명한 하워드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뒤 10대에 졸업했다.

이후 워싱턴DC에서 10년 가까이 중학교 교사로 일하고 밤에는 다운타운에서 공연하는 삶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클럽에서 그의 음악을 들은 재즈 음악가 레스 맥캔의 도움을 받아 애틀랜틱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1969년 첫 앨범 ‘퍼스트 테이크(First Take)’를 발표해 데뷔했다.

이후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 ‘더 퍼스트 타임 에버 아이 소우 유어 페이스’(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에 삽입되면서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노래는 이듬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라 6주 동안 정상을 지켰고,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했다.

또 같은 해 절친한 친구이자 가수 도니 해서웨이와 함께 부른 듀엣곡 ‘웨어 이즈 더 러브’(Where Is the Love)로 그래미 ‘최우수 팝 보컬 퍼포먼스 듀오·그룹’ 상도 받았다.

1973년에는 타이틀곡 ‘킬링 미…’가 수록된 앨범 ‘킬링 미 소프틀리’(Killing Me Softly)를 발표했고, 이 앨범으로 빌보드 차트에서 5주 동안 1위를 차지하며 또다시 크게 히트했다. 이 노래로는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와 ‘최우수 팝 보컬 퍼포먼스’ 상을 받았다.

그는 다섯 번째 솔로 앨범인 ‘필 라이크 메이킹 러브’(Feel Like Makin‘ Love)를 만들 때부터 프로듀서 역할도 맡기 시작했다.

미국 남부에서 자란 흑인으로서 인종 차별을 경험했던 플랙은 사회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트라잉 타임스’(Tryin‘ Times)와 ’컴페어드 투 왓‘(Compared to What), ’발라드 오브 더 새드 영 멘‘(Ballad of the Sad Young Men) 등 노래를 통해 인종차별과 사회·경제적 불평등, 성소수자 문제를 다뤘다. 2019년 로버타 플랙 재단을 설립해 음악과 동물 복지 사업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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