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 주제로 3·1운동-현재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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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삼삼예술축제의 ‘원일과 달아나 밴드’ [삼삼삼예술축제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 조선인 소녀 간난이는 일본인 소년 류지에게 요청한다. “조선 말을 배워. 내가 일본 말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면 너와 나는 조선 말과 일본 말을 섞어서 이야기할 수 있잖아.” 간난이는 만세, 조선말이기 때문에. 류지는 반자이, 일본말이기 때문에. “함께 외치자. 그러면 조선은 독립할 수 있어.” (권보드래 작가의 ‘3월 1일의 밤’ 중)
거문고와 해금이 어우러진 음들 위로 간난이와 류지의 이야기가 맑고 차분한 음성으로 낭독된다. 아득한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소년·소녀의 그날 뒤로 음악그룹 힐금의 ‘황무지’가 들려온다. 불길한 가야금(조요인), 거문고(김예림), 해금(박소민)이 각자의 소리를 내다 날카롭고 정교하게 맞물린다. 저마다의 소리로 웅변하다 하나로 합쳐지며 나의 목소리가 우리의 이야기, 시대의 함성이라고 웅변한다. 전통의 악기로 만들어내는 세련된 미니멀리즘의 극치가 ‘위대한 거사’의 밤을 노래한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용산구 한남동까지…. 1919년 3·1운동이 물결치던 ‘삼일대로’ 한복판에 자리한 삼일로 창고 극장에서 106년의 세월을 건너뛴 자유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2025 삼삼삼예술축제(1~3일)의 개막공연 ‘방랑자’ 중 힐금의 무대였다.
올해로 4회를 맞은 삼삼삼예술축제는 3·1절을 기념, 예술을 통해 시대정신을 조명하는 공연과 강연, 전시를 두루 겸한다. 축제는 ‘3·1절에, 3일간, 삼일대로’에서 열린다는 의미에서 ‘삼삼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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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삼삼예술축제의 ‘원일과 달아나 밴드’ 중 힐금의 무대 [삼삼삼예술축제 제공] |
축제의 방향성은 역사의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만세운동으로 향하나, 거창한 뜻을 품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우연 같은 즐거움이었고, 기획 단계와 횟수를 거듭하며 의미가 더해지고 규모가 확장됐다.
김준영 삼삼삼예술축제 총감독은 “대단한 사명감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며 “3·1운동에 담긴 시대정신을 (우리가 사는) 오늘에, 예술로 연결하기 위해 3·1운동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봐야 했고, 그 과정에서 3·1운동에 대해 정말 무지했다는 자각과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컸다”고 말했다.
축제는 거문고 연주자인 김준영 총감독과 가까운 예술가, 공연 기획자들이 의기투합해 출발하게 됐다. 일체의 지원 없이 시작, 지금도 김 감독을 비롯해 참여 예술가와 기획자들이 사비로 꾸려간다.
김 감독은 “참여한 예술가들이 3·1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자신의 분야로 풀어낼 방법을 고민하는 시간이 매우 소중하고 스스로를 리프레시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며 “그래서인지 스스로 일손을 자처하고 사비도 털어가며 모두가 각자 제 일로 여기면서 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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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삼삼예술축제 [삼삼삼예술축제 제공] |
올해 출연자들도 마찬가지다. 개막공연으로 삼삼삼예술축제의 막을 연 ‘원일과 달아나 밴드’ 역시 ‘재능기부’로 함께 했다. 원일 전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은 축제의 기획자인 정성진 PD와의 인연으로 참여하게 됐다. 개막공연에 함께 한 출연자들 역시 원일 전 감독이 직접 섭외(?)했다. 원 전 감독은 “지난해 북촌으로 연습실을 옮기며 3·1절을 즈음해 삼삼삼예술축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축제의 취지와 의미에 공감해 함께 하게 됐다”고 귀띔했다. 폐막 공연엔 김 감독과 2018년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열린 공연 ‘귀향(Returning Home)’으로 인연을 맺은 바리톤 이응광이 꾸몄다.
프로그램의 구성도 다양하다. 이 축제는 기본적으로 ‘3·1운동의 시대정신을 오늘에 예술적으로 연결한다’는 목표를 가진다. 다만 김 감독은 “너무 민족주의적으로 흐르거나 과거를 기억하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첫해였던 2022년엔 ‘이방인’이 주제였다. 이방인(일본)에 의해 이방인이 된 조선 사람들, 누구나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두 번째 해였던 2023년엔 ‘보통 사람’을 주제로 했다. 김 감독은 “3·1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보통 사람들에게 주목해 오늘날 ‘보통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확장, 여성 독립운동가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부터 오늘날의 장애인, 성소수자를 다뤘다”고 했다.
지난해는 ‘비인간’을 주제로 삼아, 제국주의의 비인간적 처사를 인간 이외의 생명, AI(인공지능)까지 확장해 인간다움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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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삼삼예술축제의 ‘원일과 달아나 밴드’ [삼삼삼예술축제 제공] |
올해의 주제는 ‘방랑자’다. 김 감독은 “독립운동을 위해 국외로 떠난 독립운동가들, 먹고살기 위해 혹은 넓은 세상에서의 배움을 위해 고국을 떠난 사람들과 그곳에서 현재까지 살아가는 후손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날의 난민, 노숙자 등과도 연결해 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방랑자’의 의미를 담은 개·폐막 공연은 음악 안에서 방랑하며 경계를 넘는 연주자들의 무대였다. ‘원일과 달아나 밴드’는 권보드래 작가 ‘3월 1일의 밤(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한 곡으로 관객과 만났다. 담백한 음성으로 북을 치며 노래한 원일의 무대를 시작으로 연주자들이 각자의 곡을 연주한 뒤 마지막 곡 ‘3월 1일의 밤과 빛’을 통해 시나위 합주로 대미를 장식했다.
저마다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뤄가고 있는 연주자들은 그들만의 예술세계에 지나온 역사와 오늘의 갈망, 미래의 희망 등을 연주에 담았다. 음악 안에서 초월의 경지에 다가선 이들에게 106년 전 3·1운동과 현재의 광장을 잇는 열망이 고스란히 투영됐다. 바리톤 이응광은 폐막 공연 ‘모든 길은 집으로 향한다’를 통해 ‘방랑자의 노래’를 불렀다.
3일간의 축제가 이어지는 동안 삼일대로는 내내 탄핵 찬반 집회가 맞부딪힌 현장이었다. 김 감독은 “(축제를 이어오며) 3·1운동에 대해 공부할수록 놀라게 되는 것은 당시의 이야기가 오늘날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라며 “당시 시위에서 외쳤던 구호나 신문의 헤드라인은 오늘날의 그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것들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또 “3·1운동이 몇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았던 것처럼 삼삼삼예술축제도 여러 사람의 힘이 보태져 시작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더 큰 일을 만들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시대를 초월해 공명하는 자유의 목소리와 거리의 연대를 기억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