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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소재 친환경 섬유 업체 HS한솔 친환경 현수막 공정 현장. 박혜원 기자 |
[헤럴드경제=박혜원 기자] ‘현수막 지옥.’ 재보궐 선거에 이어 대통령 선거까지 치를 수 있는 한국이 또 다시 맞이할 풍경이다. 승리했든 패배했든, 유세가 끝나면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자리를 청소해야 한다. 이때 ‘폐현수막 지옥’이 온다. 소각과 매립, 탄소배출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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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1일 구청장을 새롭게 뽑는 서울 구로구의 한 건물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합] |
연간 한국에서 버려지는 현수막은 약 6000톤(t). 합성섬유 1t을 소각할 때 약 3.1t의 탄소가 배출되는 점을 고려하면, 현수막 6000t은 대략 2만t의 탄소를 배출한다. 지금 폐현수막 대부분은 소각 혹은 매립 처리된다. 쉽게 말해 태워서 온실가스를 만들거나 혹은 수십 년간 땅에 묻어두거나, 두 가지 방법이다.
아는 사람이 드물지만, 세 번째 방법도 있다. 바로 ‘생분해’다. 생분해 섬유로 만든 현수막은 땅에 매립하면 오염 물질 발생 없이 3년 안에 썩는다. 친환경 현수막을 만들 수 있는 생분해 폴리에스테르(PET) 섬유는 무려 10년 전에 이미 시장에 상품으로 나왔다. 섬유 소재 기업 휴비스가 개발한 ‘에코엔(ecoen)’ 이야기다. 에코엔 개발로 생분해 PET 섬유에 대한 국제표준(ISO)이 세계 최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생분해 섬유가 공략할 시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섬유는 의류 등 소비재에 주로 쓰이는만큼 가격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3만원짜리 일반 티셔츠와 6만원짜리 생분해 티셔츠가 있다면 쉽사리 손이 가긴 어렵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와’도 협업했지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2011년에 개발을 마친 에코엔은 10년이 지난 2021년에야 상용화됐으나 이렇게 유야무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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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소재 친환경 섬유 업체 HS한솔 이오희 사장이 친환경 현수막 공정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박혜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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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소재 친환경 섬유 업체 HS한솔 친환경 현수막 공정 현장. 박혜원 기자 |
이런 에코엔이 본격적으로 빛을 보게 된 계기가 바로 ‘현수막’이다. 폐현수막으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가 지적되며 정부가 나서면서다. 행정안전부는 2022년 친환경 현수막을 쓰는 지자체에 인센티브를 주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파주시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친환경 현수막 조례를 만들었고, 김해시에선 관내 모든 현수막에 친환경 소재를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 무렵, 동시에 대구의 한 섬유 제조 업체에서도 친환경 현수막 개발에 도전했다. 에코백 등 소형 친환경 제품을 만들던 HS한솔 이오희 사장은 친환경 현수막에 성장성이 있다고 보고 개발에 착수했다. 휴비스가 이곳과 협력해 친환경 현수막을 만들기 시작하며 판매량도 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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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소재 친환경 섬유 업체 HS한솔 친환경 현수막 공정 현장. 박혜원 기자 |
이 사장은 “초기에 몇몇 현수막 업체들도 함께 개발을 시작했는데, 돈이 안 된다며 지금은 모두 떨어져나갔다”며 “월 매출 10만원 수준에서 시작해 작년에 처음으로 1000만원을 넘겼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찾은 HS한솔 친환경 현수막 제조 공장에선 매캐한 냄새 속에 직조 공정이 한창이었다. 섬유로 현수막 원단을 직조하고, 여기에 코팅 필름을 입히는 것까지가 공정 과정이다. 여러 행사가 많은 봄철인만큼 최근 일감도 쏟아지고 있다. 이곳 관계자는 “조기 대선까지 겹치며 올해가 역대급으로 수요가 많을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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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비스 전주공장 전경. [휴비스 제공] |
오랜 시간을 들여 이처럼 어렵사리 상용화된 에코엔이 ‘폐현수막 지옥’ 해결사가 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쉽지 않다는 게 업계 안팎의 우려다. 다시, 가격 문제 때문이다.
지자체, 즉 공공에서 내거는 현수막은 전체의 극히 일부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흔히 보는 현수막은 대개 정당이나 민간 단체가 만든 현수막이다. 가격이 비교적 비쌀 수밖에 없는 친환경 현수막 원단 특성상, 이들이 굳이 친환경 현수막을 선택할 유인이 없다는 것이다.
친환경 현수막 조례를 도입한 한 지자체 관계자는 “친환경 현수막 사용 비율을 늘리려고 해도, 이를 위한 예산을 별도로 가져오기에 부담이 있다”며 “지자체장 개인의 강력한 의지가 있지 않은 이상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친환경 섬유는 이처럼 잠재력이 크지만 좀처럼 규모가 커지지 못하고 있는 시장 중 하나다. 이를 두고 연구계에서는 지적의 목소리도 나온다. 친환경 섬유 시장이 커질만큼 개발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선, 친환경 섬유를 만들어도 법적으로 인정을 받기 어렵다. 환경부는 180일 이내에 90% 이상 생분해가 되는 소재에 생분해 인증 ‘EL724’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친환경 플라스틱을 기준으로 한 기준으로, 섬유는 생분해까지 더욱 긴 시간이 필요하다.
휴비스 역시 이 문턱에서 걸려 수 년간 인증을 받지 못하다, 미국재료시험협회(ATM)로부터 ‘3년’을 기준으로 하는 생분해 인증을 최근에야 받았다. 휴비스 관계자는 “섬유용으로 사용되는 생분해 폴리에스터의 경우 한국에서는 생분해성을 인증받을 방법이 현재로는 없다”고 말했다.
친환경 섬유를 분해할 수 있는 매립장 역시 국내에는 전무하다. 친환경 섬유를 만들어도, 정작 이를 생분해할 수 있는 인프라가 마련돼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신소재 등 안전인증을 수행하는 FIT시험연구원 관계자는 “한국은 현재 매립장은 물론, 매립물을 가져올 수거 시스템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며 “연구원 차원에서 매립지 조성을 추진했으나 지자체 등 관심 부족으로 무산됐다”고 털어놨다.
한국화학경제연구원 역시 “생분해 소재들을 효율적으로 분해할 수 있는 퇴비화 매립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