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지 않는 공간은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롯데 vs 부천 소리 차이는? [파이프오르간의 세계][백스테이지]

공간·제조사·장인마다 음향 차이 뚜렷
롯데콘서트홀은 강렬한 선명한 음색
부천아트센터는 부드럽고 낭만적 색채


오스트리아의 ‘빈 뮤직페라인 홀’의 파이프를 제작한 리거(Rieger)사에서 제작한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 [롯데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3, 2, 1. 공연장의 문이 열리면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도파민을 충전하는 붉고 푸른 의자들 넘어 압도적 위용을 자랑하는 은빛의 파이프.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자태와 웅장한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으로 인해 이 거대한 악기엔 공연장의 얼굴이란 수사가 따라다닌다.

오르간은 ‘짓는다’(Build)고 표현한다. 집을 짓고, 밥을 짓듯, 시(詩)를 짓는 것처럼 충분한 시간을 들여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 만드는 악기이기 때문이다.

국내 최고의 파이프오르간 빌더(builder·짓는 사람)로 꼽히는 안자헌 마이스터는 “100여년 전만 해도 (파이프 오르간) 건축 기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아 당대 건축 양식을 모방해 만들기도 했다”며 “요즘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모양을 영상으로 먼저 구현한 뒤 설치한다”고 말했다.

캐나다 카사방 프레르(Casavant Frres) 사가 제작한 부천아트센터의 파이프 오르간 [부천아트센터 제공]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1978년 동양 최대 오르간의 등장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종의 ‘럭셔리 아이템’이다. 하지만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이 낫다.”

부산콘서트홀과 부산오페라하우스를 총괄하는 클래식부산의 예술감독인 세계적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클래식 공연장에서의 파이프 오르간의 필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파이프 오르간이 없다고 클래식 공연장으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프로그램 구성에 한계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악기의 존재는 ‘음악적 다양성’과 ‘건축적 미학’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국내 공연장에 파이프 오르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8년이다. 대한민국 공연의 산 역사인 세종문화회관에서다. 세종문화회관의 파이프는 ‘시대적 산물’이었다. 개관 당시 국무총리의 지시로 설치, ‘동양 최대 크기’의 파이프 오르간을 사명으로 설치됐다. 일본 NHK홀에 설치된 5단, 7641개의 파이프보다 더 큰 규모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이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은 개관에 맞춰 독일 ‘칼 슈케’사에서 1년의 제작 기간, 6억원(현재 35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오르간을 지었다. 전통악기인 거문고 모양으로 디자인했고, 전통 건축양식인 지붕의 추녀 모양을 살려 만들었다.


지금은 국내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이 노후화로 멈추며 현재 전국 클래식 전용 공연장 중엔 롯데콘서트홀(2016년), 부천아트센터(2022년), 부산콘서트홀(2025년)에서만 파이프 오르간을 만날 수 있다. 부산콘서트홀의 경우 오는 6월 개관을 앞두고 일찌감치 설치를 마쳤으나, 아직 일반 관객에게 공개된 적은 없다.

세 공연장의 주요 ‘스펙’ 면에선 롯데콘서트홀이 앞선다. 오스트리아의 ‘빈 뮤직페라인 홀’의 파이프를 제작한 리거(Rieger)사에서 제작, 디자인의 개발부터 설치까지 무려 2년이 넘는 기간이 걸렸다. 디자인과 도면 제작에만 9개월, 파이프 제작에 9개월, 운송 2개월, 설치 3개월, 조율 4개월, 테크니컬 테스트에 5개월이 들었다. 5000여개의 파이프, 68개의 스톱, 4단 건반으로 구성한 오르간은 제작 비용만 해도 약 25억원이 들었다.

부천아트센터의 파이프 오르간은 지차제 건립 공연장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캐나다 카사방 프레르(Casavant Frres) 사가 제작을 맡았다. 캐나다의 오르간 장인들의 손을 거친 아름다운 파사드 디자인은 우아하게 물결치는 입체적 다중 곡선으로 온화한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의 벽면과 어우러지도록 했다. 2년 8개월의 기간에 걸쳐 4576개의 파이프, 63개의 스톱, 2대의 연주 콘솔로 만들어졌다. 제작비용은 28억원이다.

부산콘서트홀은 국내 콘서트홀에 4번째로 설치, 비수도권 공연장 사상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라는 기록을 쓰게 됐다. 부산콘서트홀은 독일 프라이부르거 오르겔바우 슈패트에서 제작, 4423개의 파이프, 64개 스톱, 4단 건반으로 구성됐다. 제작기간 1년 4개월, 제작비용은 30억원에 달한다.

부산의 첫 클래식 전용 공연장인 부산콘서트홀에 지어진 파이프 오르간 [연합]


공간, 장인마다 각기 다른 특색…“어울리지 않는 공간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파이프 오르간이라고 다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제작한 회사마다 음색은 천차만별이다.

안자헌 마이스터는“파이프 오르간 제조사마다 음색(보이스)의 특징에 맞는 소리를 가지고 있고, 보이싱(정음) 엔지니어의 성향이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오르가니스트 신동일 역시 “오르간 빌딩의 핵심은 보이싱 작업을 하는 마이스터의 손에 달렸다”며 “어떤 콘셉트의 악기를 만들 것인지를 구상한 뒤 바람의 압력, 파이프의 지름, 소리가 나는 구멍의 크기, 구멍의 디테일 작업을 한 뒤 파이프 오르간 고유의 특성을 만든다”고 했다.

파이프 오르간을 지을 때 각 제조사에선 공연장과 소통, 공간의 특성에 맞춰 각자 추구하는 음색을 설정한다. 부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의 보이싱을 맡은 라이너 얀케 프라이부르거 오르겔바우 슈패트 수석 엔지니어는 “파이프오르간의 소리는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라며 “공간의 음향과 장인의 기술이 어우러져 탄생하는 예술이다. 공간 음향이 오르간 소리의 절반을 결정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제작자의 손끝에서 완성된다”고 말했다.

‘적합한 공간’은 파이프 오르간 설치의 제1요건이다. 신동일 오르가니스트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를 한 격”이라고 비유했다.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 [롯데문화재단 제공]


‘잘 맞는 공간’은 파이프 오르간이 소리를 내기에 좋은 공간을 말한다. 무엇보다 충분한 ‘공간의 울림’(잔향)이 있어야 적합한 공간으로 본다. 신동일은 “유럽의 경우 돌로 지은 천장이 높은 공간에 파이프 오르간이 지어져 충분한 잔향 덕분에 파이프가 울리면서 나는 소리가 조화로운 반면, 잔향이 부족한 공간은 개별 파이프들이 합쳐지며 울리지 않아 아름답다고 느끼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박상률 부천아트센터 파이프 오르간 마이스터도 “파이프 오르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홀 안의 울림과 잔향을 비롯해 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오는 정도, 어떤 자리에서도 오르간 소리가 얼마나 잘 들리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파이프 오르간이 지어진 세 공연장은 모두 빈야드 스타일의 건축물이다. 너른 포도밭을 본뜬 객석이 무대를 에워싸고, 합창석의 뒤쪽으로 파이프 오프간이 자리하고 있다. 빈야드 스타일 콘서트홀에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할 때의 장점은 음향에 있다. 빈야드홀의 특징은 음향에 있어 ‘객석의 민주화’를 이뤘다는 점이다. 어느 자리에서나 차별없이 ‘평등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게다가 잔향도 길다. 롯데콘서트홀의 경우 2.1초, 부천아트센터의 경우 2.25초까지 나온다.


적합한 공간을 찾은 뒤 이어질 마이스터의 ‘보이싱’ 작업은 엄청난 섬세함을 요한다. 금속 덩어리인 파이프를 명료하고 아름다운 음을 내는 악기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하나하나 다듬고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이너 얀케 수석 엔지니어는 “각 파이프는 처음 손을 대는 순간부터 최종 조율을 마치기까지 약 25분이 소요된다”며 “제작실에서 모든 스톱, 가장 낮은 음부터 가장 높은 음까지 정교하게 조율한 후 구상했던 소리를 내고 있는지 확인한다”고 말했다. 부산콘서트홀의 경우 “가장 낮은 저음까지도 선명하게 전달됐다”고 그는 귀띔했다.

박상률 마이스터는 “파이프 오르간엔 굉장히 많은 종류의 스톱이 있다. 강한 소리가 나는 계열, 플루트 계열, 리드 계열 등 각각의 캐릭터가 명확해야 하고 조합했을 때 다른 악기와의 조화, 오케스트라와의 조화가 중요하다”며 “부천아트센터의 홀과 카사방 프레르 사의 악기는 개성과 조화가 충분하고, 악기와 협연했을 때도 나무랄 데가 없는 조합”이라고 했다.

부천아트센터 파이프 오르간 스톱 [부천아트센터 제공]


각 나라의 언어와 닮은 악기…롯데콘서트홀 vs 부천아트센터 vs 부산콘서트홀


악기는 언어를 닮는다. 각각의 파이프 오르간이 태어난 나라의 언어와 음악적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전문가들은 “독어권에서 만들어진 악기와 불어권에서 만든 악기가 완전히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박준병 오르가니스트)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신동일 오르가니스트는 “음악은 생겨난 곳의 시간과 장소가 만들어낸 문화를 반영하기에 해당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선호하는 음악 문화가 반영돼 있다”며 “독일의 경우 파이프 오르간이 독어를 발음하듯 자음이 잘 들리고, 프랑스 오르간은 둥글둥글한 모음이 잘 들리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차이는 확연히 다른 두 나라의 음악으로 인해 나오게 됐다. 독일 바로크 음악은 대위법(2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작곡 기술)적인 성향이 강해 여러 성부가 정확하게 잘 들릴 수 있도록 만든 반면 같은 시대의 프랑스에선 대위법보다는 화성적인 소리 자체에 집중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 신동일 오르가니스트의 설명이다.

악기의 소리는 공간과 용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과거 교회와 대성당에 지어진 파이프오르간과 달리 현대식 콘서트홀에선 솔로 악기이면서도 오케스트라, 합창단과 협연할 수 있도록 개별 소리를 작게 설정하는 것이 ‘기본값’이다. 신동일 오르가니스트는 이에 더해 “어떤 시대, 어느 나라 스타일에 기초를 둘 것인지도 고민한다”며 “최근엔 세계적으로 19세기 프랑스 스타일로 보이싱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좋은 오르간은 소리만 내도 꽃이 피는 느낌이 난다”(신동일)고 한다. 각각의 제조사와 공간의 특성에 따라 소리의 콘셉트와 정서는 다르지만, “훌륭한 소리는 듣기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신동일 오르가니스트는 말했다.

리거 사에서 만든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 [롯데문화재단 제공]


세 공연장의 파이프 오르간도 나라별, 공간별 특징을 기반으로 각자의 개성을 갖춘 소리로 지어졌다.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의 관리, 점검을 맡고 있으면서 부천아트센터와 부산콘서트홀의 파이프 오르간을 검수한 안자헌 마이스터는 “롯데콘서트홀은 카랑카랑하고 힘찬 소리, 부천으로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특징”이라고 했다. 개관 전인 부산아트센터의 경우 독일 제조사임에도 상당히 부드러운 소리로 오케스트라와의 조화로움을 강조했다는 것이 업계의 귀띔이다.

오르가니스트의 평가도 르지 않다. 신동일을 비롯해 벤 판 우스텐, 박준호 등 국내외 오르가니스트들은 롯데콘서트홀의 리거 오르간은 밝고 선명한 색채, 부천아트센터의 카사방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색, 낭만적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민준 오르가니스트는 “롯데콘서트홀의 리거 오르간이 강렬한 남성적 에너지를 지닌다면, 부천아트센터의 카사방 오르간은 섬세하고 우아한 여성적 감성을 담고 있다”고 했다.특히 그는 “카사방은 각 스톱이 개별적으로 튀기보다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크레센도와 데크레센도를 구현할 수 있다”고 했고, “리거는 각 스톱이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고, 특히 리드 파이프는 강렬하고 힘 있는 사운드를 내어 웅장한 풀 사운드를 구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부천아트센터 파이프 오르간 [부천아트센터 제공]


지난 5일 부천아트센터에서의 공연을 마친 이베타 압칼나는 “카사방 오르간은 정말 아름답고 풍부한 악기였다. 아늑한 홀과 잘 어우러지고 색채가 매우 다양하고 오르가니스트가 연주하기에 가장 편안한 악기 중 하나였다”고 했다. 벤 판 우스텐 역시 부천아트센터의 카사방 오르간을 “터치가 좋아 연주하기 쉽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준호 오르가니스트는 “롯데콘서트홀은 묵직하면서도 화려하 음색을 잘 구현하고, 풍성한 사운드 팔레트를 가지고 있어 음색을 만들 때 장점이 많다”고 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의 낭만시대 음악과 오케스트라 편곡 작품 연주에 강점이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천아트센터의 오르간은 “밝고 화려한 음색, 공간을 파고드는 힘”이 있고, “은은하고 부드러운 음색과 동시에 강력한 소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박준호는 분석했다.

박준병 오르가니스트는 “롯데콘서트홀의 경우 폭포처럼 음이 쏟아져 내리는 강렬한 선명함을 지녔고, 부천아트센터는 포근히 감싸 안는 부드러움을 갖고 있다”고 했다. 최규미 오르가니스트는 “롯데콘서트홀 오르간은 오보에, 트럼펫, 플루트 등 각 음색의 특징이 확실히 드러나고, 다른 음색들과의 조화도 적절하게 이뤄진다”며 “오르간과 공간의 어우러짐이 좋다. 악기를 누르자마자 공간 전체를 움직인다는 느낌에 전율이 온다”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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