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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지미 |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영화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10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향년 85세.
고인은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릴 정도로 국내 대표 미녀 여배우였다. 이 수식어는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미모의 여배우라는 의미가 강했지만, 고인은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반응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배우로서의 소신이 강했고, 타협이 쉽지 않을 정도로 기가 세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다.
배우 김지미는 동양미의 바탕위에 서구적인 미모가 잘 섞인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배치된 이목구비와 입체적인 두상을 지녀 360도 촬영이 가능한 배우다.
서울 덕성여고 2학년 시절인 1957년, 17살의 나이로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당시 김 감독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이쁠 수가 있냐”고 말했을 정도였다. ‘외팔이’ 등으로 유명했던 홍콩의 액션 스타 왕우도 김지미에게 반했다고 한다. “내 딸 지미~” 하며 부르던 노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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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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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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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지미 |
고인은 60~70년대 최은희, 엄앵란, 윤정희, 문희 등과 함께 때로는 경쟁하며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여배우였다. 70년대 들어 윤정희, 문희, 남정임 등 자신의 후배들인 여성 트로이카 시절에도 계속 활동하며 대한민국 공인 미녀배우이자 미녀의 대명사 자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예쁜 여배우’로만 남고 싶지는 않았다.
고인은 평생 700여편의 작품에 출연했지만 사회성 짙은 ‘길소뜸’(1986)과 ‘티켓’(1986)을 자신이 설립한 지미필름에서 제작하고 주연으로 참여했다. ‘길소뜸’은 전국이 ‘이산가족 찾기 운동’으로 떠들썩했던 지 얼마 되지 않아 분단의 아픔과 이산의 고통을 전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 고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티켓 다방을 운영하는 민지숙으로 분한 ‘티켓’ 출연 당시 46세의 나이로 전라 노출을 감행했다. ‘별아 내 가슴에’(1958), ‘춘희’(1967), ‘토지’(1974), ‘을화’(1979)에도 출연했다.
김지미는 1992년 ‘명자 아끼꼬 쏘냐’(이장호·1992)의 제작 및 주연으로 참가했지만, 흥행에 실패하고 좋은 평가를 받지도 못했다. 이후 작품 활동은 거의 없었으며, 영화인협회 이사장과 영화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다 2000년대초 딸이 사는 미국 LA로 떠났다. 물론 여기에는 명계남, 문성근 등 뜻을 달리하는 영화인들과의 갈등도 작용했다.
고인을 인터뷰 해보면 딱 부러지게 말한다. 김지미는 인터뷰365의 김두호 영화전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평생 떳떳하게 살아왔다”며 “흠이 있다면 여러 번 결혼한 것 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비굴하거나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는 인생을 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왔다. 부끄러울 일은 없다”고 말할 만큼 자신감이 넘치는 여장부 스타일이었다.
고인은 홍성기 감독과 배우 최무룡, 가수 나훈아, 내과의사 이종구 박사와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했다. 데뷔 이듬해 ‘별아 내 가슴에’를 연출한 홍성기 감독과 첫 결혼을 할 때는 18살이었다. 그 때는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최무룡과 연애할 때는 최무룡이 유부남이라 간통혐의로 고소되면서 일주일간 유치장에서 살았고, 적지 않은 위자료를 물고 최무룡과 부부가 됐다.
필자는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의 주인공이 되어 ‘디렉터스 체어’(Director‘s chair)’를 증정받게 된 김지미와, 이 행사를 후원한 에르메스 코리아 전형선 사장과 함께 스몰토크를 나눈 적이 있다. 김지미는 당시 71세인데도 LA에서 엄마와 할머니로 살며, 주말에는 농장도 가꾸며 조용하게 사는 인생이 행복하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는데도 여장부 같은 느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 행사에는 적지 않은 영화인들이 왔지만, 필자는 그녀의 명성에 비해서는 조촐하다고 생각됐다.
고인은 TV에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스크린 배우라 TV는 절대 안나간다”는 원칙 때문이었다고 한다. 8남매 집안의 일곱 번째로 태어나 조카들의 학업 뒷바라지까지 하며 열심히 살았던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