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겉보기에는 그럴듯하나 실제로는 아닌 것을 미워한다. 가짜 싹()이 진짜 곡식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한다” (惡似而非者 惡恐其亂苗也) 논어(論語) 양화(陽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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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중앙은행(ECB)은 “자본은 위기 상황에서 명확하고 예측 가능하게 작동해야 한다”며 “불확실성을 키우는 구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 인공지능 Manus로 제작된 이미지입니다 |
금융회사가 주식이 아닌 채권, 이른바 ‘사이비(似而非) 자본’으로 건전성을 보완하던 시대가 막을 내릴 전망이다. ECB가 보완자본(AT1, Additional Tier 1)의 존치 여부까지 포함한 제도 개편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ECB는 11일(현지시간) 지난 15년간 은행들이 대규모로 발행해온 하이브리드(hybrid) 채권의 구조를 손보거나 아예 폐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은행 자본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전반적인 규제 개편 논의의 일환으로 이른바 AT1이라 불리는 채권들이 구조가 조정되거나 완전히 폐지돼야 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AT1은 국내에서는 신종자본증권으로 알려진 부채성자본이다. 금융회사들의 자본 가운데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금융 규제의 ‘글로벌 표준(Global Standard)’ 특성상, 유럽발 나비효과는 머지않아 여의도 금융가에도 태풍으로 닥칠 것이다. AT1 제도가 없어진다면 금융회사는 보통주 자본비율을 높여야 한다. 증자를 하거나 배당을 줄여 ‘진짜’ 자본을 늘려야 한다.
▶ 무늬만 자본인 ‘사이비’의 민낯…만기 없다면서 옵션으로 중도상환 ‘사실상’ 강제
AT1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등장했다. 당시 은행 등 금융회사가 망하면서 부실을 메우기 위해 정부가 구제금융(bail-out)을 제공했다. 그러면서 재발 방지대책으로 자본을 보강해 부실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한(bail-in) 새 기준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바젤Ⅲ’다. AT1은 의결권도 배당권도 없지만 이자율이 높다. 대신 중간에 상환을 요구할 수도 없고(표면적으로만) 후순위 채권보다 변제 순위가 더 뒤다. 위기 상황에서는 보통주와 함께, 또는 경우에 따라 그보다 먼저 손실을 떠안을 수도 있다.
AT1은 명목상 만기가 없는 채권이어서 자본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발행회사는 대부분 조기상환 옵션(option) 조항에 따라 대부분 중도에 상환을 한다. 중도 상환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칫 시장에서 ‘불량 회사’로 낙인 찍혀 추후 자금 조달 길이 막힐 수 있다. 국내에서는 2022년 레고랜드 사태 당시 흥국생명이 영구채권 조기상환을 거부하자 금융감독원이 개입해 결국 조기상환이 이뤄졌다. 2025년에는 반대로 롯데손보가 후순위채권 조기상환을 시도했지만 금감원은 재무건전성 악화를 이유로 이를 불승인했다.
‘사이비(似而非) 자본’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금융위원회는 조기상환을 해도 그 만큼의 금액을 더 나은 조건으로 조달해야 하고 금융감독원의 승인까지 거치도록 했다. 2022년 흥국생명 사태 이후 금융위원회는 보험업 감독규정을 바꿔 발행 5년 후 상환하는 관행을 발행회사에 강요할 수 없도록 했다. 이자율을 높일(step-up) 수 있는 최소 기한도 발행 후 10년 이상으로 늘렸고, 인상 폭도 1%포인트로 제한했다. 다만 또 다른 보완자본인 후순위채권(Tier 2)에는 이 같은 장치를 추가하지 않아 빈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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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T1 채권은 부채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은행이 어려움에 처할 경우 손실을 흡수하도록 설계된 상품이다. 위기 상황에서는 보통주와 함께, 또는 경우에 따라 그보다 먼저 손실을 떠안을 수도 있다. |
▶ 유럽중앙은행 “자본은 자본 답게”
AT1 채권은 부채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은행이 어려움에 처할 경우 손실을 흡수하도록 설계된 상품이다. 은행의 재무제표에서는 보통주 자본(CET1) 아래에 위치하며, 위기 시 상각되거나 주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 채권은 은행 자본 가운데 가장 위험한 층위에 해당하지만, 동시에 투자자들에게는 고금리를 제공해 왔다.
ECB는 특히 콜옵션 행사를 통한 자본비율 왜곡 가능성, 투자자 보호 장치 부족, 발행 조건의 불명확성 등을 문제 삼고 있다. 바젤III 프레임워크 안에서 논의되는 만큼, 이는 곧 글로벌 표준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23년 크레디트스위스(CS) 위기 때, 스위스 당국은 이 은행을 UBS에 긴급 합병시키는 과정에서 AT1 채권 165억 스위스프랑을 전액 상각했다. 주주보다 채권자가 먼저 경영책임을 지는 역설적 상황은 대규모 소송전으로 번졌다.
ECB는 “AT1 채권의 이자 지급은 보장된 것이 아니며, 위기 시 지급이 중단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자본은 위기 상황에서 명확하고 예측 가능하게 작동해야 한다”며 “불확실성을 키우는 구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 금융회사 자본 부담 커질 듯…단기적으로 주가에 부담
ECB의 움직임은 은행의 글로벌 규제 기준인 바젤III에 따라 움직인다. 유럽의 규제 강화가 한국에도 적용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금융권은 AT1 폐지가 자본 조달 비용을 높일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독일 은행업계에 따르면, 유럽 은행들은 약 4180억 유로 규모의 AT1과 기타 관련 자본증권을 발행해 왔다. AT1이 사라질 경우 이 자금은 보통주 자본이나 다른 형태의 자본으로 대체돼야 한다.
국내 금융지주사와 은행도 매년 수 조원의 코코본드(Contingent Convertible Bond)를 포함한 AT1을 발행하고 있다. 2017년까지 연평균 1조원 내외였던 발행 규모는 2018~2019년 3조원대 중반으로 커졌고, 2020~2021년에는 5조원대 중반으로 뛰었다. 2022년에는 7조원대에 이르렀다. 2014년부터 2023년까지 누적으로 금융지주사는 20조6840억원어치를, 은행은 10조8330억원 규모의 AT1을 발행했다.
2024년 말 기준 국내은행의 BIS(국제결제은행) 기준 총자본비율은 평균 15.87%다. 이 중 기본자본(Tier 1)은 보통주자본(CET1)과 기타기본자본(AT1)으로 구성된다. 규제상 최소 기준은 보통주 중심이지만, 실제로는 일정 수준 이상부터 AT1 등 보완자본이 활용돼 왔다. 연 4~5%대 이자를 주는 AT1와 달리, 보통주 발행이 늘면 기존 주주 지분가치가 희석되고 지배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공자에게 서경(書經)과 춘추(春秋)가 제왕과 군주의 역사라면, 시경은 민중의 삶을 담은 날것의 기록이었다. 시장의 제도는 시장의 원칙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고, 시장 참여자들을 기만하지 않아야 한다.
“시경 삼백 편을 한마디로 덮어 말하면,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 (詩三百,一言以蔽之,曰 思無邪) 논어 위정(爲政)
복잡한 구조로 투자자를 현혹하지 않고 자본은 자본 답게 부채는 부채 답게 기능하는 것이 ‘사무사(思無邪)’다. 겉과 속이 다르고, 명분과 작동 방식이 어긋난 제도는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