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광장] 2025년을 돌아보며


2025년을 마무리하며 옷장을 열어보았다. 올해 산 옷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니 손에 꼽을 만큼만 있었다. 아마도 최근 20년 새 가장 조금 산 해였던 것 같다. 나는 불안하면 쇼핑을 통해 마음을 달래는 사람이었다. 국내, 해외를 불문하고 좋아하는 사이트 수십 개를 무한정 뒤져가며 기준도 없이 마음에 드는 게 나올 때까지 스크롤을 내렸다. 집에 도착한 택배 상자를 뜯는 순간의 설렘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올해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 어느 해보다 불안하고 두려운 시기가 계속됐던 한 해였는데도 내가 옷을 사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낯설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됐다. 올해 나의 이 변화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돌아보면 올해만큼 마음과 몸을 들여다본 해도 없었다. ‘다이어트 과학자’로 불리는 유튜버 최겸님의 간헐적 단식을 따라 하며 먹는 즐거움보다 ‘굶는 즐거움’의 효과를 경험했고, 김주환 교수님의 ‘내면소통’ 유튜브 강의를 보며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지 공부했다. 이전 같으면 불안할수록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더 많이 채우려 했지만, 올해의 나는 그 반대로 움직였다. 마음이 불안할수록 오히려 선택을 줄이고, 불필요한 것을 비우는 쪽으로 기울었다. 더 이상 쇼핑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다 오래 입은 옷을 꺼내 입는 순간, 묘하게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소비자 심리학자 러셀 벨크는 오래 사용한 물건이 ‘확장된 자아’가 되어 정체성을 안정시킨다고 설명한다. 10년째 겨울이 오면 꺼내 입는 코트, 오래된 데님의 자연스러운 주름, 수십 번 세탁하며 더 부드러워진 옥스포드 셔츠의 촉감. 올해 나는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이 나이 든 옷들이 주는 안정감을 처음으로 깊게 체감했다. 새 옷이 나를 바꾸는 것은 잠깐이지만, 오래된 옷은 시간을 통과하며 나를 지켜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패션이라는 것은 결국 ‘나를 어떻게 외부에 보여줄 것인가’라는 문제다. 그런데 마음이 건강하면 굳이 과하게 꾸밀 필요가 없다. 자존감이 높아지면 옷으로 나를 과장하지 않아도 괜찮다. 옷을 덜 사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이었던 것 같다. 외부의 시선보다 내 기준이 더 단단해지니, 필요한 만큼만 입어도 충분했다. 흥미로운 건, 마음을 돌보며 자연스럽게 몸도 건강해지자 옷태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몸이 좋아지면 과하게 비싼 옷을 사지 않아도 스타일의 균형이 잡힌다. 결국 패션은 옷에서 비롯되지만, 옷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올해 나의 패션은 ‘새로운 것’보다 ‘지켜온 것’에 가까워진 해였다. 오래 입은 옷을 꺼내 입을 때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조용히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단순히 절약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상태일 때 가장 나답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새 옷이 주는 즐거움은 여전히 좋다. 그러나 그 또한 나의 오래된 옷이 주는 깊이와 어우러질 때 더 재미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걸 분명 인정해야 한다. 올해 당신은 어떠했나. 지금 옷장을 한번 열어보자. 당신에게 가장 안정감을 주는 옷은 어떤 것인가? 그 옷은 당신의 어떤 면과 닮았을까?

지승렬 패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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