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 오간 교통사고, 바이올린이 내 삶의 심폐소생술” [인터뷰]

온기(溫記: 따스함을 기록하다)
‘휠체어 바이올리니스트’ 임현재 인터뷰
클래식 유망주, 2020년 사고 이후 절망
4년간의 멈춤 “바이올린 꼴도 보기 싫어”
다시 찾은 음악, 누군가의 공감·위로되길

 

지난해 미국 라비니아 페스티벌에서의 바이올리니스트 임현재 [본인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그날, 촉망받던 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시간이 멈췄다. 2020년 5월, 미국 명문 커티스 음악원의 졸업식 날이었다.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를 피해 귀국했던 그는 생전 처음 지나던 낯선 길 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충북 진천의 어느 도로였다.

“지금도 거기가 어디였는지는 잘 몰라요. 어쩌다 보니 지나게 된 그곳에서의 기억은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제 안에 남아있어요.”

그로부터 4년, 꽁꽁 싸맨 채 시선도 주지 않았던 바이올린을 안고 그는 다시 무대에 섰다. 2024년부터 2년에 걸쳐 5번의 콩쿠르에 나갔다. KBS한전음악콩쿠르를 시작으로 지난달 플로리다주 보카러톤에서 열린 제4회 엘마 올리베이라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EOIVC)까지. 그는 짧은 기간 벌써 두 개의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현재 미국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임현재(28)는 헤럴드경제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결과 때문에 행복하기보다는, 매일의 노력이 결실을 본 것 같아 하루하루가 기쁘고 소중하다”고 했다.

임현재의 이름 앞엔 요즘 ‘투혼’, ‘불굴의 의지’, ‘휠체어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수사가 따라다닌다. 그렇다고 그의 음악이 비극을 이겨낸 승전보에만 머물진 않는다. 그 안엔 사고와 재활, 침묵의 시간 동안 켜켜이 쌓아 올린 삶의 기억이 녹아 있다. 임현재의 시계는 멈췄던 시간을 뒤로 하고, 자신만의 음악적 계절로 향하고 있다.

생사 오간 그날의 기억…사고 후 유튜버로 전향

“병원에 있을 땐, 사실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시간이었어요.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으니까요.”

바이올린을 처음 잡은 건 일곱 살 때였다.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던 소녀는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악기를 잡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소리를 내는 것을 워낙 좋아했던 그는 바이올린을 놓지 않았다. 어릴 적엔 소파 위가 그의 예술의전당이었고, 카네기홀이었다.

2012년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한 뒤 음악은 삶의 전부와 다름없었다. 스무살이었던 2018년엔 예후디 메뉴인 콩쿠르에서 3위까지 올랐으니 일찌감치 인생 항로가 정해진 터였다.

사고 이후 1년 7개월간 병원에 머무는 동안, 무려 6번의 수술을 강행했다. 사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다른 쪽은 볼 수조차 없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습격하듯 찾아온 사고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먼저 앗아갔다. 임현재는 당시를 떠올리며 “병원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지만, 결국 실패해 그 뒤론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렇게 바이올린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장장 4년이다.

지난달 플로리다주 보카러톤에서 열린 제4회 엘마 올리베이라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EOIVC)에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임현재 [콩쿠르 제공]

“도저히 연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어느 시점엔 제가 바이올린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믿었어요. 바이올린을 싫어한다고 믿으면,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상황이 주는 슬픔도 이겨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신을 속였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던 거죠.”

사고 이후의 삶은 이전과는 다른 속도로 흘렀다. 병원에선 지난하게 흐르는 시간과 재활의 고단함을 견뎌야 했다. 음악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그렇다고 불행에 잠식당할 순 없었다. 그는 “병원에 있을 때 보석 십자수나 뜨개질처럼 손으로 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에 매달렸다”고 했다.

사실 어릴 적부터 워낙 손재주가 좋았다. 수준급 그림 실력을 갖췄고, 사고 전까진 피아노 역시 바이올린과 비슷한 수준으로 연주했다. 손으로 하는 것을 원래 좋아했던 그이지만, 사고와 후유증, 재활 과정, 바이올린에 관한 생각을 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선택도 수공예였다.

퇴원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기에 그는 난생 ‘처음’인 것들에 손을 댔다. 원체 건강한 정신력과 긍정적 마음가짐을 가진 덕에 뭐든 뛰어들 용기가 있었다. 이때 그가 시작한 것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였다.

그는 유튜브 계정을 만들어 다양한 콘텐츠를 올렸다.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 위주였다. 하나의 주제를 정해 순위를 매기는 랭킹쇼 영상도 있었다. 직접 영상을 편집하려고 3D 그래픽까지 독학했을 정도. 그의 노력에 하늘이 감탄했을까. 계정을 만든 지 불과 3개월 만에 수익이 생기는, 꽤나 잘나가는 ‘유튜버’가 됐다. 지나고 보니 그 역시 음악을 향한 그리움을 메우려는 방편이었다. 그는 “감추고 싶은 흑역사”라며 웃는다.

“미도리 선생님 열정에 세상에 다시 나와”

다시 음악으로 돌아온 것은, 마음속 헛헛함 때문이었다. 무엇을 해도 마음이 꽉 차지 않는, 공허함이 내내 따라왔다. 그는 “이것저것 해봤는데, 결국 어떤 이유로든 내겐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은 좌절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니 다시 음악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연주하진 못하더라도 가르치는 직업은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결정이 뜻밖의 선물이 됐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바이올린을 잡게 되고, 연주도 조금은 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며 “연습을 하다 보니 너무 재밌어서, 자연스럽게 다시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제자가 연습하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함께 연주하며 이전과는 다른 감각을 느꼈다.

“생각보다 너무 잘 되는 거예요. 바이올린을 오래 쉬었는데도 괜찮네, 싶었죠. (웃음) 그땐 객관성이 좀 떨어졌던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하고 놓친 것도, 안 되는 것도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 다시 시작했어요.”

완벽주의자인 임현재가 다시 이전의 기량을 찾아가는 과정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2024년 KBS한전음악콩쿠르는 사고 이후 두드린 첫 무대였다. 휠체어에 앉아 무대에 오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는 “준비가 덜 돼 휠체어에 앉아 활을 그으면 무릎에 반쯤 닿는 상태로 연주했다”고 한다. 결과는 예선 탈락이었다.

지난달 플로리다주 보카러톤에서 열린 제4회 엘마 올리베이라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EOIVC)에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임현재 [콩쿠르 제공]

그의 든든한 버팀목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스승인 고토 미도리(55)다. 임현재는 “선생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다”며 “음악가로도 인간적으로도 너무 많은 영감과 가르침을 주신 분”이라고 했다. 제자에게 음악과 함께 하는 세상을 다시 주기 위한 스승의 열정은 임현재의 가슴 한편에도 깊이 새겨졌다. 2024년 빈필하모닉과의 협연차 한국을 찾았을 때는 공연 직전까지 임현재와 수업을 진행했다.

“선생님이 주신 게 너무 많아 하나를 꼽기가 어려워요. 늘 엄마처럼 챙겨주셨죠. 음악가로도 한 인간으로도 너무나 존경하는 분이자 닮고 싶은 분이에요.”

스승의 레슨을 받으며 임현재는 착실히 다음을 준비했다. 그는 “윤이상 콩쿠르를 준비할 땐 하루에 8~10시간까지 연습했다”며 “그렇게까지 연습을 하니 손이 너무 저리고 몸이 제대로 버틸 수 없어 내게 맞는 방법을 찾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경험은 최고의 배움이었다. 콩쿠르에 도전하며 짧은 시간에도 집중력을 가지고 연습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 무렵 도움이 된 것은 ‘마인드풀 프랙티싱(mindful practicing, 의식적 연습)’이었다. 그는 “1분이든 5분이든 정확한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연습하려 했다”며 “집착에서 벗어나니 많은 연습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고 돌아본다.

사고 이후 그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음악관이다. 연주자로서 정밀한 테크닉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악보에 새겨진 음표와 음악적 기호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을 우선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음악의 방향이 달라졌다.

“이전엔 테크닉이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매달렸어요. 하지만 지금은 음악이 감정의 예술이기에 표현력과 전달력이 없다면 화려한 테크닉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음악 안엔 연주자의 성품, 인격, 삶의 태도가 묻어나는 만큼 삶과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걸 느껴요. 그러니 제 삶을 잘 살아야 제 음악도 더 나아진다는 것을 안 것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에요.”

무대에 서기 위해 연습만큼 중요한 것은 지금도 이어가는 재활과 운동이다. 그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때만 해도 무대에서 넘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신체적인 부분에 대한 불안이 너무 컸다”며 “휠체어에 앉아 연주하기에 코어를 잡아주는 것이 쉽지 않아 상체가 흐트러지기 일쑤”라고 했다. 그러니 하루에 2~3시간은 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연주자 근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지난해 미국 라비니아 페스티벌에서의 바이올리니스트 임현재 [본인 제공]

 

바이올린은 나의 심폐소생술…“누군가의 공감·위로 되길”

지난해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의 우승이 유달리 벅찼던 것은, 몸에 대한 불안을 떨쳐낸 뒤 마주한 값진 트로피이기 때문이다.

“무대로 나가 연주하기 직전이 제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어요. 이전엔 나의 실력은 차치하고라도, 신체적 부분에 대한 현실적 걱정에 이러다 도망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과 긴장도가 높았어요. 그런데 저만의 데이터가 쌓인 이후 갖게 된 무대에선 연주하기 직전의 그 감각과 행복의 감정을 잊을 수가 없더라고요.”

장장 다섯 번의 콩쿠르 도전을 연이어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음악은 살아있음을 깨워주는 호흡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연주자에게 콩쿠르는 가혹한 압박이나, 임현재는 그것 역시 ‘기회’라고 봤다. 새로운 날들을 위한 기회가 아닌 ‘지금 당장’ 오를 수 있는 ‘무대의 기회’였다.

그는 “(콩쿠르는) 내가 숨을 쉴 기회라고 생각했고, 그 기회가 있을 때 도전해 보고 싶었다”며 “스트레스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경쟁보다는 내 음악을 어떻게 전달하고 싶은지를 더 많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멈췄던 시간’은 단순히 ‘공백’은 아니었다. 그날들은 세상과 다시 소통하는 방법을 찾는 성숙의 시간이었다. “왜 바이올린을 해야 하는지, 왜 음악을 하는지,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를 고민해 찾은 답은 이제 세상 밖으로 하나씩 나오고 있다. 지금 그는 연주자 인생의 두 번째 챕터를 열었다. 올해는 한국 공연이 특히 많다. 3~4월엔 서울, 부산 등지에서 협연과 리사이틀이, 8월엔 서울시향과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

“누구에게나 스토리가 있고, 저 역시 지나온 스토리가 있어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 일들이 제게 없었더라도 지금처럼 똑같이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나갔을 거예요. 하지만 더 깊이 알게 된 것이 있어요. 바이올린은 제게 다시 살 수 있게 숨을 불어넣어 준 심폐소생술이라는 거예요. 바람이 있다면, 제 음악이 저만의 기쁨이 아닌 누군가의 공감과 위로의 울림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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