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 대기업 은퇴 후 중국 회사 자문한 A씨 무죄
협력사 회유해 자료 빼돌렸지만…법원은 “대외비 관리 제대로 안해”
재판서 기업에 ‘문단속’ 책임 지적하는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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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rf] |
[헤럴드경제=박혜원 기자] “보안서약을 한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특정 기술에 대한 서약은 아니다. …(중략) 따라서, 피해 회사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합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2023년 국내 조선 대기업에서 재직한 이력으로 10억원을 받고 중국 경쟁사에 기술 자문을 한 A씨에게 ‘무죄’를 내린 판결문 일부다. A씨는 22년간 대기업에 재직하며 대부분 액화천연가스(LNG) 선박 제조 연구개발 담당 부서에 소속돼 근무했다.
수사 결과 A씨가 회사를 나오며 노트북에 다운로드 받은 LNG 선박 관련 기밀 문서는 52개에 달했다. 업무 관계에 엮여 있던 협력사 임원들에게 연락해 ‘나중에 수주가 잘 되도록 도와주겠다’며 용접 절차가 담긴 파일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후 A씨는 퇴직 3년만인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중국 조선사 2곳에 기술 자문을 해주며 각각 6억원, 4억원을 받았다.
하지만 법원은 ▷A씨와 피해 회사가 보안 서약을 맺긴 했지만, 특정 기술을 지목해 쓰인 서약은 아니었다는 점 ▷A씨가 유출한 기술이 피해 회사만의 독점적인 기술이 아니라는 점 등을 들어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기술유출에 대한 국내 판결은 기술을 유출한 개인보다 되레 보안 관리에 소홀했다는 점을 들어 기업에 책임을 묻는 경향이 짙은 상황이다. 기업이 얼마나 보안에 최선을 다했는지를 특히 엄격하게 따지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업무 과정에서 회사 내 정보 공유가 불가피하고 모든 자료에 개별적으로 보안을 요구하기도 어려운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A씨 판례에서도 법원은 기밀 자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회사 책임이 더욱 크다고 판단했다. 회사는 A씨와 애초 비밀유지동의서를 작성했으며, A씨가 유출한 자료 자체도 열람이 제한돼 있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법원은 기업의 보안 노력이 미흡했다는 점을 꼬집었다. 법원은 A씨가 유출한 자료가 실제 기밀이었다면 해당 자료를 특정해 보안 서약을 쓰거나 암호 설정, 반출 시 승인 절차 등을 갖춰야 했다고 본 것이다.
법원은 A씨에게 자료를 보낸 협력사와 관련해서는 피해 회사가 각 파일을 대외비로 엄격하게 관리하도록 지시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쉽게 말해 기술을 훔쳐간 도둑보다 문단속을 제대로 못 한 집주인의 책임이 더 크다는 뜻이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경우 이같은 보안 노력이 대기업에 비해 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 년간 개발해온 자료가 경쟁사에 그대로 유출됐음에도 재판서 패소한 중소기업 사건에서는 업계의 열악한 보안 체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열차 바닥 소재를 생산하는 회사에 다니던 B씨는 발주처 요구에 맞춰 개발한 소재 레시피(배합비)를 가져가 경쟁사에서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법원은 피해 기업에 영업 비밀 취급에 대한 사내 규정이 없고, 관련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영업비밀 관리 담당자도 따로 없다는 점을 들었다.
이에 전문가들은 정밀한 보안 체계를 실질적으로 갖추기 어려운 중소기업의 현실을 재판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태준 클로저법률사무소 변호사는 “기술유출 범죄의 본질은 타인의 영업비밀을 부정하게 유출했다는 것인데, 정작 그 죄의 성립은 기업이 얼마나 비밀을 잘 관리했는지에 달려 있다”며 “자금 사정이 좋지 못한 중소기업 입장에선 기술개발에 인력과 자원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술유출은 중소기업에서 더욱 많이 발생한다. 이재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검찰에 송치된 179건의 기술유출 사건 중 86%(155건)가 중소기업에서 발생했다.
법원에서 보안 유지 기준을 완화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부정경쟁방지법에서 규정하는 기업의 영업비밀 관리 요건은 ‘상당한 노력에 의하여 비밀로 유지된’에서 2015년 ‘합리적인 노력에 의하여 비밀로 유지된’, 2019년 ‘비밀로 관리된’으로 두 차례에 걸쳐 개정됐다.
그럼에도 기업에 책임을 묻는 기조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는 게 현장 의견이다. 한국특허법학회는 “여전히 회사의 기밀 유지 노력을 구체적으로 보는 법리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태준 변호사는 “기업의 규모, 동종 업계의 특정, 영업비밀의 성질을 고려해 현실적인 판단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