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혐오로 분출된 욕망…파시즘이 낳은 ‘남성 판타지’

1차 대전 후 獨자유군단 남성의 글 분석
女·군중을 ‘강한 남성성’ 장애물로 인식
나치즘서 인터넷 혐오까지 이어졌다 주장
문화·젠더 고전, 50년만에 한국어로 출간



남성 판타지 클라우스 테벨라이트 지음 김정은 옮김 글항아리


“피에 대한 갈증! 공포보다 훨씬 더 앞서는 강렬한 느낌이다. 전사는 몰아치는 붉은 파도에 휘말려 든다. (중략) 분노의 들판 위에 파괴의 전율이 구름처럼 드리운다. (중략) 피의 환락이다.”

1977~1978년 독일에서 출간된 클라우스 테벨라이트의 ‘남성 판타지’가 50년 만에 한국어판으로 출간됐다. 1464쪽에 달하는 이 책은 파시스트 남성성을 독자적인 시각으로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문화 비평, 남성성 연구, 정신분석학, 젠더 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고전으로 평가된다.

‘남성 판타지’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에서 활동하던 우익 민병대 조직 ‘자유군단’의 남성들이 남긴 일기, 편지, 소설 등을 통해 ‘파시즘적 개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분석한다. 자유군단은 패전한 독일에 좌파 혁명단체들이 난립하자 퇴역 군인과 우익 깡패들이 바이마르 공화국과 기존 정치권의 사주 하에 만든 조직이다. 이들은 독일 파시즘의 권력 강화에 기여했으며, 이후 나치 정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자는 파시즘이 정치적 선동의 결과가 아니라, 남성들의 개인적 공포와 환상(판타지)에서 배태됐다고 주장한다. 패전한 군인들은 사회로 돌아왔지만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혁명이 일어나고, 여성들이 거리로 나오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세상은 그들에게 ‘축축하고, 흐물흐물하고, 자신들을 삼켜버릴 것 같은 오물’처럼 느껴졌다.

자유군단 대원들은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자신을 ‘강철 같은 군인’으로 재정립한다. 군대식 훈련과 규율로 몸을 기계화하고, 언어와 사고도 통제해 외부와 단절된 요새를 만든다.

이들에게 여성은 본능적으로 욕망하면서도 자신을 무너뜨리는 공포의 대상으로, “위험한 구렁텅이”이자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심연”이었다. 그 때문에 어머니, 누이, 간호사처럼 존경하는 ‘백색 여성’은 거리감을 두고 공산주의 여성,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 등 ‘적색 여성’은 증오했다. 심지어 전쟁기간 자신을 기다린 아내까지도 혐오의 대상이 된다.

혁명군이나 일반 군중도 자신들의 질서를 오염시키는 “오물”로 여긴다. 여성과 군중 모두 인간으로 보지 않고, 사회에서 제거해야 할 적으로 대상화한다.

이들은 현실을 마주하는 대신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을 지키기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았다. 과도하게 잔혹한 살인을 하며 흥분하고 쾌락을 느끼는 모습은 이들이 광기의 상태였음을 드러낸다.

자유군단의 파시스트 남성성은 ‘나치즘’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더 끔찍하다. 자유군단은 후일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나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 등 나치 핵심 간부 중 상당수가 자유군단 출신이었다. 그들의 정신은 나치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됐다.

이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대두한 극우주의와 극우 남성성, 혐오 문화와도 닮았다. 저자는 2019년 개정판 서문에서 최근 사회문제가 된 ‘인셀(Involuntary Celibate·비자발적 순결) 운동’과 네오 나치, 테러 범죄 등을 언급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남성 테러리즘 활동의 중심에는 은폐된 혹은 노골적인 여성 혐오가 날뛰고 있다. 이들 ‘운동’은 인터넷을 통해 세력을 확대한다. 예전에는 남들 눈을 피해 사이비 종파처럼 몰래 회합하던 이들이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적 영향력을 얻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자유군단처럼 자신의 세계관을 지키기 위해 온라인 커뮤니티와 익명성을 요새로 삼아 집단의 일원으로서 강한 유대감을 느끼고, 편향된 신념을 강화한다.

50년 전 사회에 충격을 안겼던 책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은 씁쓸하고 무섭다. 타인을 파괴함으로써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는 판타지는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잠식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때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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