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목소리로 구성한 그날의 이야기
8분 거리 소녀도 구조하지 못했던 비극
“정의실현까지 목소리 계속 울려 퍼질것”
![]() |
| [찬란/(주)더콘텐츠온 제공] |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미소가 예쁜 6살의 소녀는 바다를 좋아했다. 엄마에겐 전쟁이 끝나면 모래사장에서 놀고 싶다는 바람을 종종 말하곤 했다. 하지만 소녀의 작고 소중한 바람은 전장의 참혹함에 희생돼 평생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에게 총을 쏘고 있어요.”
오늘도, 지구 어딘가에선 무고한 어린아이에게까지 총알 세례를 쏟아붓는, 애당초 목적지를 잃어버린 전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애써 모른 척, 그것이 줄 불편함을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있다. 총과 권력을 쥔 자들이 벌린 잔혹한 싸움에 ‘왜’ 죄 없는 이들이 잔인하게 희생당해야 하는가. 견디기 힘들어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현실에 대한 기록, 영화 ‘힌드의 목소리’다.
![]() |
| [찬란/(주)더콘텐츠온 제공] |
오는 15일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의 영화 ‘힌드의 목소리’가 우리나라 관객을 찾는다. 영화는 지난 2024년 1월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몇 시간 동안 차량에 갇힌 후 목숨을 잃은 6살 팔레스타인 소녀 ‘힌드 라잡’의 이야기를 응급 구조대의 실제 녹음을 통해 들려준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 수상작으로, 영화제에서 역대 최장 기립박수 기록(23분)을 세워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객석에서 흐느끼는 관객도 있었다”고 전했다.
영화는 적신월사(이슬람권 적십자사) 팔레스타인 라말라 지사에 걸려 온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한다. 독일에서 전화를 건 남성은 가족이 탄 차가 가자지구에서 피격됐다며 구조를 요청한다. 전화를 받은 대원 ‘오마르’(모타스 말히스 분)는 건네받은 가족의 번호로 전화를 건다. 전화 건너에서 들리는 것은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 탱크가 우리 앞에 있다며 상황을 전하던 그 목소리는 거친 총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영화는 안내한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실제 목소리입니다.’
비극에 대한 충격, 아이를 살리지 못한 죄책감이 오마르를 휩쓴다. 아직 그 차 안에 여자아이가 살아있다는 남성의 전화를 다시 받기 전까지 말이다. 다시 건 전화에 ‘다행히도’ 살아있는 또 다른 아이의 목소리가 응답한다. 아이의 이름은 ‘힌드 라잡 하마다’, 나이는 6살, 유치원생이다.
“시간이 없어요. 옆에 아무도 없어요.”
![]() |
| [찬란/(주)더콘텐츠온 제공] |
가자지구에 있는 구조대와 아이가 갇힌 차량까지는 불과 8분 거리다. 오마르는 상사에게 당장 아이를 구할 것을 구조대에게 지시하라 재촉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상사는 구조대 투입 전 안전 경로를 확보하는 ‘조정’이 끝나야만 구조대를 보낼 수 있다고 답한다. 아이를 구하려다 구조대가 이스라엘군의 공격에 희생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만든 복잡한 현실은 눈앞의 아이에게 다가갈 잠깐의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적신월사 대원들은 적신월사와 적십자사, 이스라엘 국방부 소속 팔레스타인 민사 담당 기구(COGAT) 등 3자가 참여하는 기약 없는 ‘조정’이 끝날 때까지 힌드와의 전화를 이어간다. 그 사이에 힌드가 탄 차를 겨눈 이스라엘군의 총구는 쉬지 않고 힌드의 목숨을 노린다.
“제발 나를 버리지 않아요. 죽었어요. 가족 전부 죽었어요.”
좀처럼 끝나지 않는 조정, 다급한 적신월사, 간절한 힌드의 목소리. 답답함과 긴박함이 교차하는 스크린은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격한 감정으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벌써 아이를 수십번이고 구하고도 남았을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힌드와의 통화가 몇 번이나 끊기고 연결되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럼에도 ‘용감하고 씩씩하게’ 버티며 구조를 요청하는 힌드의 목소리가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미 알고 있던 비극이, 사실은 그저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더 큰 비극이었음을.
![]() |
| [찬란/(주)더콘텐츠온 제공] |
간절히 기다린 조정은 ‘5시간’ 만에 극적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수많은 보도를 통해 알려졌듯, 힌드는 자신의 마지막 목소리를 남긴 그곳에서 이스라엘군의 총격 속에 목숨을 잃었다. 힌드를 구하러 가던 중 교신이 끊겼던 구급차는 불과 힌드로부터 50m 떨어진 거리에서 처참하게 부서진 채 발견됐다. 당시 세계 곳곳에서는 어린아이와, 합의된 구조 작업까지도 총구를 겨눈 이스라엘군에 대한 항의와 규탄의 목소리가 일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중간 지대를 택한 영화는 힌드의 실제 목소리와 당시 적신월사 직원들을 분한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전쟁의 참상과 민낯을 생생하게 전한다. 그날의 시간과 감정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연출은 단순히 그날의 재현을 넘어 ‘왜 이 이야기를 영화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소한다. 90여분의 러닝타임이 영원처럼 느껴지고, 상영관을 채우는 힌드의 목소리에 목이 메온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차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실제·현실·진실과 같은 존재론적 단어와 만나 ‘피해서는 안 되는 현실’이 된다.
오마르가 힌드에게 유치원 이름이 뭐냐고 묻자 힌드가 답한다. “‘행복한 아이들’이요.” 우리는, 어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전쟁이란 폭력과 이기의 산물이 그 누구의 행복과 자유, 권리를 앗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 |
| [찬란/(주)더콘텐츠온 제공] |
전쟁으로 무고한 이가 희생되는 것에 관해 정치적 판단이 설 자리가 있을까. 영화는 팔레스타인의 편에서 이스라엘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보다, 그저 시체와 같이 갇혀 있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감정을 따라간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작은 생명의 목숨, 나아가 아이의 꿈, 마음껏 바다에서 뛰놀며 행복하게 자라날 아이를 ‘지켜주는 것’이다. 엔딩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잔잔한 파도 소리가 오래도록 귓가에 맴돈다.
“힌드의 목소리는 전 세계가 들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소리는 정의와 책임이 실현될 때까지 계속 울려 퍼질 것입니다.” (벤 하니야 감독)
1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