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살 스누피에 숨 불어넣다…할리우드의 한국인 애니메이터 성지연

[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저희 스튜디오가 ‘스누피’를 맡게 됐을 때요? 너무 좋아서 혼자 소리 질렀잖아요. 하하.”

성지연(37) 애니메이터는 스누피 3D 애니메이션에 참여할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성 애니메이터는 2003년부터 미국의 유명 애니메이션 제작사 블루스카이 스튜디오에 몸 담고 있다. 블루스카이 스튜디오는 디즈니·픽사만큼 친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탄탄한 기술력에 힘입어 무서운 후발 주자로 자리잡았다. ‘아이스 에이지’와 ‘리오’ 시리즈, ‘에픽: 숲속의 전설’ 등이 대표작이다.

스누피 탄생 65주년을 맞아 제작된 애니메이션 ‘스누피: 더 피너츠 무비’의 개봉을 앞두고, 블루스카이 스튜디오의 성지연 애니메이터가 한국을 찾았다. 조명 파트에 속한 성지연 애니메이터는, 캐릭터와 배경에 현실과 흡사한 색감, 명암 등을 부여해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사진 제공=호호호비치]

12월 개봉을 앞둔 ‘스누피: 더 피너츠 무비’(이하 ‘스누피 3D’)는 블루스카이 스튜디오와 성지연 애니메이터의 새로운 대표작이 될 전망이다. ‘스누피 3D’는 전 세계인이 사랑한 만화 ‘피너츠’의 탄생 65주년을 기념해 제작되는 애니메이션. 국내 관객에게도 스누피는 TV 만화 뿐 아니라 각종 캐릭터 상품으로 친숙하다. 스누피의 이름값이 워낙 높다보니 제작진의 부담도 클 수 밖에 없었다.

“스누피를 어떻게 3D로 만드나 걱정하는 사람 반, 저처럼 좋아하는 사람 반이었던 것 같아요. 잘못 접근했다간 ‘가필드’나 ‘스머프’와 같은 실패 사례가 될 수도 있죠. 특히 스누피는 원작자 가족들이 관여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떻게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고 만들 것인가 걱정이 컸어요.”

성지연 애니메이터는 조명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일한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조명’ 파트가 낯선 이들도 많겠지만, 실은 ‘애니메이팅’(캐릭터나 물체의 움직임을 만드는 것) 파트와 함께 가장 많은 인원이 속한 부서다. 애니메이션에서 조명의 역할은 실사영화와 유사하다. 캐릭터와 배경 등에 조명 효과를 부여해 좀 더 사실적이고 보기 좋은 비주얼을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예쁜 전학생이 교실에 발을 들였을 때, 찰리 브라운의 눈엔 그녀가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서 후광효과가 조명팀의 몫이다. 눈 쌓인 배경을 표현하는 데도 조명이 필수다. 그늘진 부분과 더럽혀진 부분 등이 조명을 통해 표현돼야 비로소 사실감이 생기는 것이다. 


“원래 조명은 있을 때는 아무도 중요한 걸 몰라요. 그런데 없으면 다들 알아채죠. 조명을 잘 한 영화를 보고 ‘조명이 멋있더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조명이 별로인 영화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다들 알아요. 초기 3D 애니메이션을 보면 어색한 장면들이 있는데, 빛과 그림자의 관계가 부자연스러워서 그런 경우가 많아요. (조명이) 자연스러우면 자연스러울 수록 그 존재를 모를 수 밖에 없죠.”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성지연 애니메이터를 할리우드로 이끈 건 ‘스타워즈’였다. ‘어떻게 만들었길래 저런 비주얼이 나오나’ 입이 떡 벌어졌고, 본격적으로 컴퓨터 그래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예술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그 때부터 시각적으로 예쁜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고. 그래서인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입사해서도 자연스럽게 조명 쪽으로 온 것 같다고 성 애니메이터는 말했다. “움직임을 만드는 것도 의미 있지만, 예쁜 이미지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더 컸어요. 또, 조명이 좋은 게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에 저희가 손 댄 이후엔 아무도 손을 못 댄다는 거죠.(웃음)”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지 애니메이션의 성공 비결은 ‘철저한 기획’에 있다고 귀뜸했다. 애니메이션은 제작 기간도 길고 참여 인원도 많기 때문에, 웬만한 블록버스터 못지 않은 제작비가 든다. 엄청난 돈과 인력이 투입되는 만큼, 사전 기획에 철저할 수 밖에 없다. 스누피 역시 2005년 테스트 시퀀스를 만든 뒤 약 10년이 지나서야 영화로 완성될 수 있었다. 

최근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대체로 세계 시장을 염두에 둔 작품을 만든다. 그러기 위해선 보편적인 내용을 그리면서도, 자신 만의 개성과 독창성이 있는 콘셉트가 필요하다. 이 둘 사이를 조율하는 것이 관건. 성지연 애니메이터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과제 역시 ‘한국적인 독창성을 가져가면서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내용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미래의 애니메이터들을 향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학생들을 만나면 ‘어떤 프로그램을 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런데 기술은 키워나갈 수 있지만 안목은 키우기 어렵죠. 조명 쪽에선 소프트웨어 보단, 조명이나 그림자와 관련된 공부를 더 많이 할 필요가 있어요. 한 가지 더, 여기선 자기 주장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해요. 학생들을 인터뷰하면 ‘뽑아만 주시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러는데, ‘난 이게 하고 싶고, 이걸 잘한다’고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었으면 해요.”

 ‘원작 캐릭터 있으니 쉬웠겠다고?’ 3D 스누피 고군분투 제작기

‘스누피’ 만화의 영화화 계획은 몇 년 전부터 업계에서 구체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원작자 찰스 슐츠의 아들이 영화화하고 싶은 스토리가 나오기 전까진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난항에 부딪혔다. 그러던 중 찰스 슐츠의 손자 브라이언 슐츠가 동료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에 나섰고, 스토리가 완성되자 스티브 마티노 감독에게 연출 제의가 들어왔다.

스티브 마티노 감독은 “피너츠 팬으로서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주위에서도 다들 원작을 좋아하다보니 영화를 망치면 안 된다고 난리였다. 큰 부담이었지만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신세대들에겐 스누피를 새롭게 소개하고, 전세계 팬들에겐 향수를 전하고 싶었다”는 포부를 밝혔다.

찰스 슐츠에 대한 자료가 전시된 박물관에서 여정이 시작됐다. 마티노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의 목표는 원작의 펜 선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블루스카이 스튜디오의 독보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3D 애니메이션의 생동감을 더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이를 위해 모든 슈퍼바이저들이 슐츠의 펜 선과 그리기 기법 등을 3주 코스로 배우는가 하면, 슐츠의 일대기를 비롯해 그에 관한 모든 것을 공부했다.

캐릭터는 이미 완성돼있으니 캐릭터 디자인은 수월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오산이었다. 생전 슐츠가 장장 50년에 걸쳐 손으로 그려왔기 때문에, 스누피 머리의 곡선이라던지 코의 위치, 크기 등이 미묘하게 다 달랐다. 제작진은 스누피의 이목구비를 떼어내 다양하게 조합하며 최상의 캐릭터를 잡았다. 그렇게 12명의 캐릭터를 완성하는 데 1년 가까이 걸렸다. 게다가 3D 애니메이션 캐릭터이기 때문에, 인물의 모든 각도에서 드로잉이 필요했다. 3년여 고된 여정 끝에, 막바지 후반 작업과 개봉 만을 남겨두고 있다.

“찰리 브라운이 ‘오늘은 연을 날릴 수 있을 거야’, ‘오늘은 이길 수 있어!’라고 다짐하는 것처럼, 저도 ‘오늘은 우리가 원하는 영상을 완성할 수 있을 거야’라고 자기암시를 걸었죠. 도전의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이든, 찰리의 친절함과 인내심, 포기하지 않는 정신 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한 자질이 아닐까요?”(스티브 마티노)

ha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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