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디 무브먼트 컴포저’, 몸의 움직임을 지휘하는 사람. 한국영화 엔딩크레딧에 올해 처음 등장한 이름이다. 그동안은 무술감독의 영역인 줄만 알았다. 온갖 액션의 합을 맞추고 배우들을 이쪽으로 저쪽으로 움직이라고 지시하는 것은. 최근 잇달아 한국영화에 새로운 시도이자 생경한 소재였던 ‘좀비’가 등장하면서 보디 무브먼트 컴포저라는 이름도 생겨났다. 좀비의 움직임을 구현하는 것이 임무다.
한국 제1호 리듬체조 선수에서 재즈댄스 안무가로, 또 ‘곡성’과 ‘부산행’의 보디 무브먼트 컴포저로 영화인 대열에 발을 들인 박재인 무브스튜디오 대표를 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좀비 움직임을 전문적으로 디자인한 것은) 한국영화로는 ‘곡성’이 처음이에요. 나홍진 감독님이 직접 찾아오셨었는데, 의외였죠. 나 감독님이 워낙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넣어서 쓰시는 걸로 유명하시잖아요. 분명히 나라는 사람을 찾아왔을 때는 이유가 있을 거다, 또 우리나라 최초니까…. 그런 점에서 저를 더 채찍질했죠.”
[사진= 영화 ‘곡성’과 ‘부산행’에서 좀비의 움직임을 디자인한 박재인 무브스튜디오 대표. 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
이미 할리우드 등 외국에서는 보디 무브먼트 컴포저라는 말이 보편화해 있다. 또 미국에는 1960년대부터 발달한 ‘좀비 영화 종주국’답게 좀비의 움직임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대형 스튜디오도 여러 군데 있다. 보조출연자든 일반인이든 좀비 오디션을 통해 ‘워킹데드’ 시리즈 같은 좀비물에 출연자를 공급하는 형태의 에이전시들이라고 보면 된다.
박재인 대표가 운영하는 무브스튜디오도 그런 ‘좀비 스튜디오’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곡성’보다 전면적으로 좀비를 내세운 ‘부산행’을 준비하면서 이 스튜디오를 거쳐 간 좀비들만 100여 명이나 된다.
“정예부대 50명에다가, 사람이 더 필요하겠다 싶어서 50명을 더해 100명 정도가 스튜디오에 왔죠. 조감독과 이틀에 걸쳐 분리 작업을 했어요. 좀비 동작을 가르쳐줘 보고 ‘아 얘네들은 좀 활달해’하면 군인 좀비, ‘얘네들은 좀 날렵해’하면 야구부 좀비가 되는 거죠. 그러고 나서 군인은 군인들끼리 빨리 달리면서 하는 좀비 동작을, 야구부는 야구부대로 컴컴한 기차 안에서 휴면상태로 하는 잔동작을 연습했어요.”
‘부산행’ 좀비에는 특성이 있다. 빛이 있는 상태에서는 움직임이 재빠르고 빛이 없으면 몽유병 환자처럼 휴면상태에 들어간다. 소리에 민감하고 사람이 보이는대로 달려들지만 문을 여는 방법은 모른다. 기본적인 콘셉트 아래 연상호 감독은 박 대표에게 “일단은 ‘곡성’과 다를 것”,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나 게임 ’세븐데이즈 투 다이’에 나오는 좀비를 참고해줄 것”을 요구했다.
[사진= 영화 ‘곡성’과 ‘부산행’에서 좀비의 움직임을 디자인한 박재인 무브스튜디오 대표. 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
이를 바탕으로 박 대표는 파킨슨병 환자의 재활치료를 도우면서 익혔던 지식을 가미했다.
“파킨슨병 환자 앞에 장애물이 있잖아요? 그러면 내가 저걸 넘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하는데도 머리가 굳으니까 몸도 굳는대요. 할아버지 한 분이 한 20분 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꺾기만 하다가 비로소 피해서 넘어가시더라고요. 그때 배웠던 걸 많이 참고했어요.”
영화에는 수백 명의 좀비가 등장하지만 이들마다도 ‘개성’이 있다. 박 대표는 주요 캐릭터들마다 하나씩 특색을 입혔다. 부산행 KTX에 오른 최초 좀비인 심은경에게는 뒤로 누워 있다가 허리의 힘만으로 일어나는 동작을, 심은경에게 물린 KTX 승무원 역의 우도임에게는 좁은 열차 칸 바닥에서 허리를 뒤집고 발작하는 듯한 동작을, 다음에 물린 팀장 역의 한성수에게는 빠른 시간에 허리를 접고 다리를 꺾고 무섭게 공유에게 달려가는 긴박한 동작을 줬다. 비보이 댄서 두 명에게는 ‘본 브레이크’ 댄스에서 착안한 기괴하게 몸을 꺾는 동작을 주고 색깔을 입혔다.
“(그런 개성들은) 10초 미만에 지나가야 돼요. 인위적으로 오래 비추면 관객들도 ‘얘 춤추는 애구나!’ 알아요. 그저 ‘헉, 이게 뭐였지?’ 공포감을 유발하도록 양념으로 넣은 것뿐이지요.”
[사진= 영화 ‘곡성’과 ‘부산행’에서 좀비의 움직임을 디자인한 박재인 무브스튜디오 대표. 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
공간 특성에 따라 좀비 움직임이 달라진 측면도 있다. 야외에서 등장한 군인 좀비는 공격적이고 맹목적으로 점프해 가면서 사람들을 물어야 하고, 좁은 열차 칸의 야구부 좀비는 휴면상태에서 잔동작을 하는 식이었다.
좀비 동작을 만들고 가르치며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좀비는 사람이 아니고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몇 날 며칠을 연습했으니 몸은 좀비 동작을 알고 있잖아요. 연습실과 현장의 공간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배웠던 걸 생각하고 하면 리얼하지가 않아요. 사람하고는 달라 보여야 하는 거잖아요. 특히 주인공이나 일반사람들하고 있을 때는 완전히 차이가 나야 해요. 분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가장 중요한 건 넘어졌을 때 손을 짚지 말자는 것. 의식이 있는 사람은 손을 뻗겠죠. 손목을 꺾든지 팔꿈치로 떨어지든지 아니면 엉덩이로 넘어지자. 그리고 세트장에서 어디에 부딪히면 뭔가를 부여잡지 말고 반대로 튕겨나가자. 또 사람과 마주하는 부분에서 반응할 때 눈부터 마주치지 말자. 이거였어요.”
박 대표는 영화판으로 흘러들어오기 전까지 리듬체조, 재즈댄스 등 다양한 배경을 거쳐왔다. ‘곡성’, ‘부산행’ 이전에도 2012년 영화 ‘댄싱퀸’에 안무지도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지금도 그가 운영하는 무브스튜디오에서는 매일 폴댄스 개인레슨과 단체레슨이 진행된다.
“여러 가지를 했던 게 영화에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학교(체대) 다닐 때 리듬체조 시합하면서 오는 스트레스, 코치로 학생들 훈련시키면서 받았던 스트레스, 88 서울올림픽에서 매스게임 안무지도를 맡았을 때 3000명을 앞에 두고 가르쳤던 스트레스 등이 많았지만, 저한테는 경력으로 남은 거거든요. 그게 교습 능력이 될 수도 있는 거고요. 어릴 때부터 ‘한우물만 파지 말아라’가 제 모토였어요. 춤도 한국무용만 빼고는 다 배워봤어요.”
박 대표는 영화는 “정직한 작업”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게으르게 촬영한 것도, 정말 최선을 다한 것도 스크린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했다. 어렵지만 계속 도전하고 싶은 것이 ‘영화’라는 것이다.
그는 “몸을 움직이는 것은 무한하다”고 말한다.
“앞으로 또 좀비가 아니더라도 공포영화에서 일반 관객의 고정관념을 깰 수 있는 귀신의 움직임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공포영화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어떤 감독님이든 만약 저의 도움을 원하신다면 전 그런 고정관념을 깰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저는 아직 ‘영화인’은 아니지만, 엄지발가락 살짝 담근 정도? 영화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춤추는 사람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