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엔 ‘악질’ 도피범이 많거든요. 건장한 남자가 몸으로 버티고 떼 쓰고…, 어떻게든 안 오려고 발버둥인데 그 방법도 각양각색이에요.”
7000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동남아시아 국가 필리핀은 해외로 도망친 범죄자에게 ‘최적’의 은신처 중 한 곳이다. 8만여명 안팎인 현지 교민이 마닐라, 세부, 앙헬레스 등 주요 도시에 거주하고 있어 이들이 교민 사회에 스며들기도 용이하다. 현지 치안이 허술한 틈을 타 도피범의 행각도 대담해지고 있다.
16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필리핀에서 도피 중 국내에 강제송환된 국외도피사범은 102명으로, 전체 국가 가운데 중국(154명) 다음으로 많았다. 2022년에는 96명, 2021년에는 102명으로 2년간은 중국(2022년 94명, 2021년 93명)보다 그 수가 많았다. 전체 송환대상국 가운데 필리핀은 평균적으로 20%대 중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필리핀에는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한 사범이 가장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보이스피싱 사기범의 해외 도피가 두드러진 가운데 필리핀도 주요 도피 대상국 중 하나다. 대형 카지노가 많은 필리핀 특성상 도박사범들도 한 부분을 차지한다. 예전엔 마카오로 많이 향했던 도박사범들이 홍콩·마카오의 중국반환 후 필리핀이나 베트남 등지로 행선지를 옮겼다는 분석도 있다.
교민사회가 대형화한 것도 영향이 있다는 게 경찰 측 설명이다. 경찰청 인터폴국제공조과 관계자는 “최근에는 교민 수가 다소 줄어들었다지만, 필리핀 주요 도시에 한국 교민이 많이 살고 있다보니 같은 얼굴을 한 범죄자가 현지에 스며들기가 쉽다”면서 “교민 사이에 있으면 범죄자인 게 두드러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교민이 많은 중국과 베트남으로 범죄자가 많이 향하는 것도 그 이유”라고 설명했다.
섬이 많아 추적이 쉽지 않다는 점도 필리핀으로 향하게 하는 큰 이유다. 실제로 9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의 호화 리조트에서 검거돼 곧 국내 송환을 앞둔 전 건강보험공단 재정팀장 A씨도 여러 섬을 떠돌면서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건보공단 재직 시절 요양급여 등 46억원을 빼돌린 혐의를 받는다.
도피범이 은신하는 데 도움을 주는 현지 조직이 이미 자리잡고 있어, 이에 연계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또 “투자회사 명함을 파고 다니는 대담한 도피범도 있다. 하지만 금세 거짓이라는 ‘냄새’가 나 들통나기도 한다”고 했다.
필리핀에선 최근 교묘한 수법도 퍼지고 있다. 국내로의 강제송환을 늦추기 위해 현지 추가 범행을 저지르고 현지 수사를 받는 방식이다. 현지 범죄에 대한 수사가 우선이 돼 국내 송환 시기를 미룰 수 있고, 형이 확정된다면 송환이 더 어려워진다. 한국은 필리핀과 수용자 이송 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지 수용소에 있는 피의자 가운데 절반 가량이 이 같은 ‘꼼수’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경찰청은 이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검거와 송환 사이 최대한 시일을 줄여 즉시 국내로 데려오도록 공조를 강화하고 있다. 여전히 뇌물 등 새어나갈 구멍이 있는 현지 분위기이기에 최대한 그 틈을 주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한편 중국은 경찰이 추적하고 있는 국외도피사범이 가장 많은 국가다. 지린성이나 산둥성 등 연안 지역에 보이스피싱 피의자가 다수 도주해 있다. 조선족이 많아 현지 도피가 더욱 용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공안청도 불법체류자에 대한 강제추방이 활발해 강제송환된 피의자 수도 많다. 입국 비자가 불필요한 베트남이나 태국 등으로의 도피도 활발하다.
경찰청은 올해 주요 국외도피사범에 대한 집중관리 체계를 강화하기로 했다. 보이스피싱·전세사기 등 악성 사기나 마약 등 중독성 범죄 주요 사범을 ‘핵심’ 등급으로, 국수본·수사관서에서 매우 중요한 국외도피사범으로 선정한 자를 ‘중점’ 등급으로, 이외 중요 국외도피사범은 ‘일반’ 등급으로 나눠 검거와 송환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방침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도피범의 행각이 날로 진화하고 있지만, 이들을 끝까지 추적해 어떻게든 송환해 국내 사법체계 내 정당한 심판을 받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이세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