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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하철 방화 참사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헌화가 사고 현장인 중앙로 역에 이어지고 있다. 2003.2.19 [연합] |
참사 조롱에 정치적 혐오까지 더해져
윤석기 희생자대책위원장 인터뷰
[헤럴드경제=김도윤·박준규 기자]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53분. 대구도시철도 1호선 안심행(行) 1079열차가 중앙로역에 들어서자, 방화범 김대한이 가방 속 휘발유에 불을 붙였다. 주변 승객 몇이 막아섰지만, 불길은 몇 초 만에 객차 안으로 번졌다. 승강장과 역 안으로 삽시간에 검은 가스가 퍼졌다. 192명이 이날 숨을 거뒀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다. 유가족들은 18일 22번째 기일을 맞았다.
‘대구FC는 불전동차’
사고가 난 그해 7월 당시 프로축구 안양LG의 서포터즈 클럽이 대구 연고팀인 대구FC를 ‘불전동차’로 묘사했다. 지하철 화재를 본따 조롱한 것이었다. 축구계는 물론 시민사회에서 ‘선 넘었다’라는 비판과 항의가 쏟아졌다. 그러자 이들은 온라인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리고 경기장에 ‘유가족들에게 정중히 사과드린다’고 적은 현수막을 걸기도 했다.
그때를 기억하는 윤석기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원장은 헤럴드경제와 통화에서 “서포터 집행부 몇 명이 유족 사무실에 찾아왔다. 자기 팀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그런 표현을 썼는데 당사자들에겐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까진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사과했다”고 말했다.
이 일은 대구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겪은 조롱과 비난의 일부다. ‘통구이’라는 조롱부터 ‘돈 노리고 시체 장사를 한다’는 모욕적인 막말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던 인터넷 포털 게시판에서 빗발쳤다.
이는 가족을 잃은 충격에 더해 그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진 이런 조롱은 ‘개인의 일탈’ 수준이었다. 윤 위원장은 “악성 댓글을 경찰에 신고해 실제로 여럿을 검거했다. 그런데 잡고 보니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이 많아서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사과문을 쓰는 조건으로 그들을 형사 처벌까지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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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대구FC 프로축구팀을 ‘불전동차’로 묘사해 질타를 받은 당시 안양LG 구단의 서포터즈들이 사과 현수막을 경기장에 걸어둔 모습 |
이후에도 이 나라에선 끔찍한 참사가 그치질 않았다. 그 진행 과정을 지켜본 윤 위원장은 “세월호 (참사가) 지나면서 정파적인 대립, 정치적 이념이나 지형에 따라 움직이는 세력들의 개입이 많아졌다”고 진단했다. 정당의 지도부도 대놓고 ‘놀러 가다 죽은 사람들 왜 나라가 책임지느냐’고 발언했고, 이게 지지자들을 자극하며 혐오가 확대 재생산됐다.
당시 공공 영역은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 대놓고 비겁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한 바로 다음 날, 대구시와 대구지하철공사는 군 장병들의 지원까지 받아서 현장을 말끔하게 청소했다. 사고·범죄 현장 조사의 대원칙인 ‘현장 보존’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윤 위원장은 “(사고현장에서) 치운 쓰레기 더미에서 유족들이 유품 140여점과 희생자 신체 일부 14점을 찾았다”며 “심지어 찾지도 못했던 실종자 유해는 거기서 처음 발견됐다. 그걸로 재수사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그 분은 영원히 실종자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여년 사이 유족들의 심리적 충격을 보듬는 제도적 장치들이 생겼고, 참사를 대하는 여론도 성숙해졌다고 윤 위원장은 느낀다.
그는 지난해 말 발생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에서 악성 게시글에 대해 즉각적인 경찰 조사 등이 이뤄진 점을 긍정적으로 봤다. 그러면서 “철저한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죽은 사람 죽었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식의 말들이 나오는 걸 들을 때마다 우리는 여전히 참사 중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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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대원들이 대구지하철 화재 현장에서 전소된 전동차를 살펴보고 있다. 2003.2.18 [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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