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 여친과 성관계 뒤 “바람 피웠다” 거짓 폭로…삶을 등진 딸, 부모는 법정서 또 고개를 숙였다 [세상&]

피해자 “성폭행 당했다” 고소
형사재판에서 무죄 확정
민사재판에서 1000만원만 배상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는 참고용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지난 2021년 6월, SNS에 전 여자친구를 저격하는 글이 하나 올라왔다. 작성자 A씨는 “전 여자친구가 바람을 피웠으며 헤어지자마자 다른 남성과 사귀었다”고 적었다.

피해자는 고등학생에 불과했다. 허위 사실이었지만 헛소문이 퍼졌다. 피해자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상담 치료와 약물 처방을 시작했다.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 피해자는 3차례에 걸친 시도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피해자의 부모는 딸의 죽음의 배경에 A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부모는 A씨를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물었다.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기나긴 법적 공방을 견뎠지만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성폭행 혐의에 대해선 무죄가 확정됐다.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긴 했지만 위자료의 값은 1000만원에 불과했다. 헤럴드경제가 사건을 되짚어봤다.

헤어진 뒤 “바람 피웠다” 허위사실 유포


A씨는 피해자와 2020년 12월부터 2021년 6월까지 교제했다. 둘 모두 미성년자로 고등학생이었다. A씨는 성적 접촉 및 성관계를 요구했다. 피해자는 A씨에게 “속옷 안쪽 이상엔 스킨십을 하지마라”고 했다.

헤어지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겼다. A씨는 피해자의 SNS를 해킹해 피해자가 친구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훔쳐봤다. 이어 SNS에 “피해자가 바람을 피웠다”는 취지의 허위 사실을 폭로했다.

6개월 뒤 피해자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이 무렵 피해자는 A씨를 성폭행으로 고소했다. 고소가 약 9개월 늦어진 경위에 대해 A씨는 “길을 가다가 문득 ‘아 이게 성폭행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진술했다. 우울증에 걸린 피해자는 입원까지 하며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지난 2023년 5월께 사망했다.

치료 과정에서 피해자의 부모는 A씨의 존재를 알게 됐다. 피해자와 친구가 피해 경험에 관해 나눈 대화를 어머니가 발견했다. 부모는 A씨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이어갔다. 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했다.

성폭행 관련 무죄 확정…명예훼손 등만 일부 유죄


법원 [헤럴드경제DB]


형사 재판에선 성폭행 관련 혐의에 무죄가 확정됐다. 1·2심에 이어 대법원의 판단도 같았다. 해킹과 SNS에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에 대해서만 일부 유죄가 인정됐다.

1심을 맡은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1형사부(부장 김희수)는 지난해 11월, A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성관계 당시엔 피고인(A씨)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다가 9개월이 지나서야 성폭행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은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피해자가 A씨에게 ‘속옷 안쪽 이상의 스킨십은 하지마라’는 취지의 문자메시지를 남긴 것에 대해서도 법원은 “피해자도 일정 수준의 성적 접촉까진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것만으론 일정 수위 이상의 성적 접촉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성관계 이후에도 피해자가 A씨에게 많이 의지를 했던 정황이 보인다”며 “카카오톡으로 ‘나를 떠나가면 안 된다’, ‘나 못 산다’ 등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피해자는 “성관계 이후 A씨에게 전화로 성관계에 대해 사과를 받았다”고 했지만 법원은 “해당 대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명시적인 동의가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를 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며 “피해자가 당황스러웠던 것으로 이해될 뿐 성폭행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기엔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검사가 항소했지만 2심의 판단도 같았다. 2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12-3형사부(부장 김민아)도 지난 4월, 1심과 같이 판단했다.

2심 재판부도 “피해자가 성관계 당시 거부하는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시하진 않았다고 판단된다”며 “피고인이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을 통해 성관계를 가졌다고 평가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검사가 상고했으나 대법원의 판단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대법원도 지난 4월, 성폭행 혐의에 무죄를 확정했다.

민사재판 결과…법원 “1000만원만 배상”


민사사건에서도 성폭행과 관련한 A씨의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다.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민사7단독 허정훈 판사는 “A씨가 유족에게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로 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A씨가 피해자의 SNS를 해킹한 것·허위 사실을 유포해 명예를 훼손한 것에 대해 “망인이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는 점이 경험칙상 명백하다”며 “유족에게 10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했다.

재판 과정에서 유족은 “A씨가 피해자를 성폭행했다”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법원은 “형사재판에서 ‘명확한 동의 없이 성관계에 나아갔다고 볼 여지는 있을 수 있지만 이를 넘어서서 폭행·협박을 통해 성폭행을 했다는 점은 증명되지 않았다”며 “무죄가 확정된 이상 유족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이로써 민·형사 재판에서 모두 A씨는 피해자에 대한 성폭행 관련 책임이 면제됐다. 명예훼손에 관련된 부분만 일부 유죄와 일부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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