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지형변화, 채널 아닌 콘텐츠 시대

[헤럴드경제=서병기 기자]TV의 지형도가 크게 변화하면서 채널 파괴 시대가 본격화하고 있다. 지상파의 변방에 존재했던 케이블과 종편(종합편성채널)의 약진이 두드러지면서 이제 시청자들도 채널이 아닌 콘텐츠로 선택하는 시대가 됐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케이블 채널의 시청률은 1%만 나와도 ‘대박’이라고 했다. 케이블 채널에서 훌륭한 콘텐츠가 별로 나오지 않은데다 설령 있다 해도 케이블이라는 이유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보지 않으니 제작진의 의욕이 강해질 수도 없었다. 이때만 해도 드라마 외주제작사들은 지상파에서 편성을 받지 못하고 케이블 채널로 가게 되면 난감해했다. 케이블과 종편이 지상파의 하위 매체라는 개념이 통용될 때였다. 메이저 시장과 마이너 시장이 양분돼 있었다. 케이블과 종편에서 최근 킬러 콘텐츠들이 잇따라 나오면서 그런 구도는 사라졌다. 이제 케이블이건 종편이건 재미있고 좋은 콘텐츠와 브랜드를 골라 시청하는 현상이 생기고 있다.

국민의 라이프스타일 변화, 콘텐츠 유통채널의 다양화, 미디어 관련 기술의 변화가 엇물리면서 TV 시청패턴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이것이 영상관련 산업의 대규모 지각변동을 알리는 시작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현상을 주도하는 곳은 tvN과 JTBC이다. tvN ‘꽃보다 누나’는 1회 시청률이 10%를 넘어섰다. 지상파도 두자릿수 시청률을 올리는 예능이 손에 꼽을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혁명’이라 할 만하다. 중노년 배우들의 배낭여행기 ‘꽃보다 할배’는 대중문화계의 노년층을 훨씬 더 친근하게 바라보게 했다. 시청률이 10%에 육박한 tvN ‘응답하라 1994’는 복고 열풍과 함께 국민적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시청률 외에도 수많은 이슈와 화제를 낳으며 ‘응사앓이’와 ‘응사열풍’에 빠지게 했다. ‘응사’는 드라마의 개념과 제작방식까지 바꿀 태세다. 한 번도 드라마를 만들어보지 않은 예능PD(신원호)와 예능작가(이우정)에 의해 제작된 드라마여서 드라마계 종사자들은 더욱 놀라고 있다. 상반기에 방송된 판타지 멜로드라마 tvN ‘나인’은 한국형 판타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나인’ 다시보기 열풍도 불었다.

JTBC도 ‘썰전’ ‘히든싱어’ ‘유자식 상팔자’ ‘마녀사냥’ 등 신선한 인기 예능을 선보였다. 정치 시사 뉴스라기보다는 술자리에서 하는 정치 이면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까운 ‘하드코어 뉴스깨기’와 초기보다는 신선함과 과감성이 약화됐지만 그래도 차별화된 ‘예능심판자’ 두 코너로 구성된 ‘썰전’은 토크쇼의 새로운 ‘놈’임에 분명했다. 유명 가수와 모창능력자의 노래 대결이 펼쳐지는 ‘히든싱어’는 인기를 얻으며 시즌2는 신승훈 등 톱가수들의 섭외가 더 쉬워졌다. 원조가수들은 출연했다 하면 음원이 대박으로 이어지고, 모창능력자들은 행사가수로 크게 바빠졌다.

거침없는 입담을 펼치는 스타 부모와 사춘기 자녀들의 대화로 부모와 자식 간의 세대차를 엿보게 하는 ‘유자식 상팔자’는 웬만한 지상파 토크쇼의 시청률보다 높다. 부모 시청자들이 자식들을 이해할 수 있는 교재라고까지 말한다. ‘마녀사냥’은 20ㆍ30대의 농밀한 성(性)에 관한 토크가 거침없지만 저급하지 않다. 오히려 솔직하게 사적인 욕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에 이끌린다는 사람들이 많다. JTBC는 드라마에서도 김수현 작가의 ‘무자식 상팔자’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tvN과 JTBC, 두 채널의 공통점은 지상파 3사의 우수 PD들을 대거 스카우트했다는 점이다. KBS와 MBC에서 역량이 검증된 PD들과 작가들이 유입돼 이미 짜여져 답답할 수도 있는 온실을 벗어나 정글에서 마음껏 힘을 발휘하게 했다. 기존 포맷의 답습이 아닌 실험정신으로 무장했다. ‘썰전’의 여운혁 CP, ‘꽃보다~’의 나영석 PD, ‘응사’의 신원호 PDㆍ이우정 작가는 “콘텐츠만이 경쟁력”이라는 사실을 입증해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스타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초기에는 tvN이 2030, JTBC는 중년들을 각각 메인타깃으로 하는 매체 전략을 수립했으나 킬러 콘텐츠가 늘어나면서 전 세대를 아우르는 매체가 돼가고 있다. 지상파와 케이블은 경쟁상대가 못 됐지만 콘텐츠로 승부하는 시대가 되면서 거의 대등한 경쟁관계로 변하고 있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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