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부가 사는 법] 늦깎이 가수 케니 김-우순이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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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에 울고 웃어온 부부는 어느덧 오누이처럼 닮아있다. 이제는 가수와 매니저가 된 케니 김씨와 부인 우순이씨.

이민 생활 40년, 부부가 거쳐 온 직업만 30여 가지다.

시행착오는 셀 수도 없다. 사기를 당해 빈털털이가 되어 길거리에 나 앉은 적도 있다. 그래도 용했던 것이 절대 서로를 원망한 적은 없다. 돌아보니 그게 ‘답’이었던 거 같다. 샌디에고에 살고 있는 케니 김(67) 우순이(64)씨가 말하는 ‘우리 부부가 사는 법’이다. 우선 부부는 바쁘다. 평생 부지런히 살아와서인지 몸이 편한 것을 견디질 못한다.

연간 매출을 알면 깜짝 놀랄만한 알짜배기 식품업체 ‘씨탱글(SeaTangle)’의 공동대표, 조용하고 아담한 수련원의 관리인, 3집 앨범 발매를 앞둔 가수와 매니저. 이 모두가 부부가 하고 있는 일들이다.

“공장 일은 이제 하나씩 두 딸과 사위에게 넘기려고 한다. 미국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니 그 아이들이 더 잘 할 것이다. 수련원이야 오는 손님이 있으면 반갑게 맞아 대접하면 되는 것이고…. 요즘 우리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가수와 매니저라고 대답한다”

샌디에고 가수 ‘케니 김’하면 이제 제법 아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 저기 행사에서 초대가수 섭외도 종종 들어온다. 지난 김종서 LA 공연 때는 오프닝 무대에도 섰다.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에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는 이들을 보고 부럽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부부는 그야말로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겪어야 했다. 부부는 허허 웃으며 40년 타향살이에 소설책 한 권쯤 나오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오히려 되묻는다.

“1973년 단돈 300달러를 들고 도착한 곳이 오하이오였다. 41년 전이다. 그때부터 정말 안해본 일이 없는 거 같다. 여보, 우리 제인이 생겼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기억나오?”

빛 바랜 사진을 들여다보며 부부는 40년 세월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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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미국에 온 첫 해 오하이오 킹 아일랜드에서 함께한 케니 김, 우순이 부부

남편은 석유 시추선에 고압 용접공으로 취직해 2주에 한번 집에 올 수 있었다. 아내는 배가 부른 채로 가발가게, 세탁소 등을 옮겨 다니며 일했다. 겨우 돈을 좀 모아 미국인으로부터 바디샵을 구입했는데 한마디로 속아서 산 가게였다. 부부는 무일푼으로 두 딸을 데리고 거리로 나 앉게 될 지경까지 몰렸다.

“재미있는 것은 희망은 절망 속에서 찾아 온다는 것이다. 교회 한 집사님이 자신의 피자가게를 맡아서 한번 해보라 하더라. 문을 닫을 위기에 있는 가게였는데 그날로 아내와 피자 반죽을 돌리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미시시피강 모래를 퍼다 나르는 일을 했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믿었다”

부부가 샌디에고로 옮겨 온 것은 1994년. 이번에는 농사꾼이 되어 오이, 참외, 배추 등을 기르기 시작했다. 거름으로 이웃집에서 버린 소똥을 가져다 뿌렸는데 결과는 대박이었다. LA에 있는 한인 마켓들이 줄을 서서 부부의 농작물들을 가지고 갔다. 누군가 멕시코에 땅을 사서 규모를 늘리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부부는 믿었던 사람에게서 또다시 상처를 입었다.

“많은 손해를 봤지만 가족이 건강하니 됐다고 서로 위로했다. 그 무렵 한국에서 천사채 공장을 경영하는 지인이 미국에서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왔다. 공장이라면 자신 있었다. 내가 공고출신이다(웃음)”

1998년 해조류 가공업체 ‘씨탱글’을 만들었다. 케니 박씨는 부품 하나하나를 구입해 직접 기계를 만들어 공장을 지었다. 해조류는 몸에 좋은 식품이니 미국사람들도 금방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하기는 커녕 오만 인상을 다 쓰더라. 버티고 버티다가 5년이 지나고 포기해야지 하는데 반응이 오더라. 지금은 홀푸드, 마더스 마켓 같은 곳에서 제일 인기 있는 상품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참 용하네~”

전쟁 같던 이민생활에 어느덧 두 딸도 자기 짝을 만났다. 이제 겨우 숨 좀 돌리려 보니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남편은 그때서야 가슴에 꼭꼭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내어 놓았다.

“중학교 때 학원비 떼어먹으며 배운 기타가 내 음악인생의 전부이지만 한번도 가수에 대한 꿈을 버린 적은 없었다.진심으로 가수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탄생한 2010년 1집 앨범 <노신사의 노래>. 한국에서 작곡가 김준규씨의 곡을 받은 케니 김은 진짜 가수가 됐다. 아내 우순이씨는 남편의 난데없는 가수 선언을 지지해준 일등공신이다. 비록 1집 수록곡 <케니의 첫사랑> <의리없는 여자>가 남편의 헤어진 첫사랑에 대한 노래였을 지라도 말이다.

케니 김씨는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고 있다. 한 라디오방송을 통해 소개된 김씨의 노래를 듣고 주문이 폭주했다는 후문이다.

2013년 2집 앨범을 내면서 유명세를 타게 된 남편 덕분에 아내도 바빠졌다. 사람 좋아 평소 ‘NO’를 못하는 성격의 남편 대신 스케줄 관리도 하고 공연이나 촬영이 있으면 코디 역할도 해야 한다.

“케니 김의 노래가 좋아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간다. 내 노래가 지친 이민생활에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노래를 잘하는 큰사위, 작은 딸과 함께 가족 콘서트도 꾸며보고 싶다”

같은 일에 울고 웃다 보니 어느덧 닮은 얼굴을 하고 있는 두 사람. 크고 작은 실패에도 누구 탓이라 시비를 가리기 보다는 서로 위로하며 다독여 왔다고.

문득 가수 케니 김이 부르는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곱고 희던 두 손으로 넥타이를 메어 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큰 딸아이 결혼식날 흘리던~눈물 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그 눈물을 기억하오~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하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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