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쎄시봉’ 정우 “쟤 연기 안 된다 말에 자괴감도…”

[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평생 너를 위해 노래할게”

남들 앞에서 노래라곤 해본 적 없던 근태(정우 분)가 첫사랑 그녀 앞에서 수줍게 약속한다. 특별할 것 없는 고백인데도, 정우의 입을 빌리면 달라진다. 사투리에 실려온 투박한 진심은, 잘 다듬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신뢰가 간다. 더벅머리에 큰 눈을 껌벅이는 모습은, 묘하게 모성 본능을 자극한다. 정우가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에 이어 또 한번 ‘순정남’을 연기한 것이 우연은 아닌 셈이다.

정우는 영화 ‘쎄시봉’(감독 김현석ㆍ제작 제이필름/무브픽쳐스)으로 1년여 만에 대중 앞에 섰다. 드라마에서 1990년대를 살았던 그가 이번엔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영화는 무교동을 주름 잡았던 음악감상실 ‘쎄시봉’을 배경으로, 눈 부시게 빛났던 청춘들과 그들의 아련한 첫사랑을 그렸다. 


정우와 쎄시봉의 만남은 필연적이다. 정우에게 순정남 캐릭터가 ‘잘 맞는 옷’이라는 점은 물론, 그가 쎄시봉 노래를 즐겨 들었던 팬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에게 당시 노래와 감성은 여전히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를, 서두르기보다는 느리게 가는 삶을 지향하는 정우에겐, 조금은 더딘 듯한 ‘쎄시봉’ 청춘들의 사랑법도 반가웠다.

▶“아, 기대 하시라 개봉 박두!”(송창식 ‘담배가게 아가씨’)=‘응사’ 이후 팬들은 정우의 근황을 궁금해했다. 고아라, 유연석, 손호준 등은 드라마부터 영화, 예능까지 종횡무진 활약했지만 유독 정우는 보기 어려웠다. 일각에선 ‘정우가 작품을 지나치게 까다롭게 고른다’는 가시돋힌 풍문도 들려왔다. 사실 정우는 내내 촬영장에 있었다. ‘쎄시봉’ 촬영을 마친 뒤 지금은 ‘히말라야’(감독 이석훈) 현장에 합류했다.

“사실 영화 촬영은 계속 했는데, 대중 앞에 서는 게 오랜만이죠. 작품을 고른다기 보다는, 선택하는 데 고민을 많이 하는 건 사실이에요. 흥행 여부를 떠나서 ‘이 작품에 참여했을 때 정말 최선을 다 할 수 있는가’, ‘흥행에 참패하더라도 후회 없을 작품인가’를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물어봐요.”


그렇게 정우의 마음을 홀린 것이 ‘쎄시봉’이었다. 시나리오가 재미있다 보니 ‘복고의 아이콘’, ‘순정남 전문 배우’ 꼬리표가 붙을 걱정을 미리 하진 않았다. 게다가 그는 쎄시봉이 재조명받기 전부터 이들의 노래를 좋아했다. 쎄시봉 멤버들 뿐 아니라 김광석, 김현식, 이문세까지… 좋아하는 가수들을 열거하는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물론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10~20대에 들었던 ‘응사’시절 명곡들에도 열광한다.

“얼마 전에 (무한도전) ‘토토가’를 보고 울었어요. 1부 보고 울면서 다음 방송을 기다렸죠.(웃음) 아무래도 무대에 선 분들을 응원한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그 분들이 만약 다른 곳에서 토크를 했다고 해도 반갑긴 하겠지만, 활동 당시 모습 그대로 그 시절 노래를 들려줬다는 게 반갑고 고마웠어요. 심지어 그런 아이디어를 내고 방송을 만들어준 분들도 감사하더라고요.”

▶“밤 하늘의 별만큼이나 수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윤형주 ‘우리들의 이야기’)=쎄시봉 노래를 좋아하는 것과, 직접 연주하고 부르는 것은 천양지차다. 요즘 아이돌이야 노래에 연주에 연기까지 익히지만, 정우는 뮤지컬 무대에 선 적도, 기타도 잡아본 일도 없었다. 쎄시봉의 일원으로 무대에 서기까지 남은 시간은 두 달여 뿐이었다.

“솔직히 두 달 동안 노래와 기타 실력을 끌어올려봤자 얼마나 올리겠어요? 최소한 잘하는 척은 하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다른 이의 창법이나 다른 이의 노래 실력을 흉내내진 말아야겠다, 떨리면 떨리는대로 진심만 잘 전달될 수 있으면 그 걸로 용서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충이 있었지만, 일각에선 정우가 ‘쉬운 길을 간다’고 생각했다. 전작에서 갑자기 주목받은 배우들은, 이미지 변신에 대한 강박 때문에 의식적으로 모험을 하기도 한다. 반면 경상도 사투리에,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춘 캐릭터는 정우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행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전작과의 차별성을 의식해서 작품을 선택하진 않아요. 대신 ‘순정남’이라고 해도 지고지순한 캐릭터는 원치 않아서 그 점은 감독님께 말씀 드렸죠. 나중에 제 작품을 쭉 모아놓으면, ‘다 비슷하다’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어요. 정우는 하나인데 어쩌겠어요. 작품마다 캐릭터나 상황이 바뀔 수는 있어도, 거기서 제 자신을 완벽하게 걷어낼 수는 없어요. 작품에서 그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까 고민하는 거죠.”

현장에서 정우는 본능적이고 즉흥적으로 연기하는 편이다. 물론 사전에 캐릭터를 분석해 가지만, 현장 분위기나 상대 배우의 연기에 따라 바뀔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정우에게 ‘쎄시봉’ 현장은 제목에 담긴 뜻 그대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C‘est si bon). 그는 “현장의 적당한 긴장감이 프로페셔널한 느낌의 것이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긴장감이 아니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노를 저어가라 가자 가자 가자, 가슴 한번 다시 펴고”(송창식 ‘가나다라’)=그렇다면 ‘쎄시봉’의 오근태가 아닌, 실제 정우의 20대 시절은 어땠을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참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는 한 마디로 정리했다.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다니고 있었지만, 연기자가 되기 위해 뭘 준비해야 할 지 고민하며 시간만 보냈다. 어렵게 현장에 발을 들였지만 상처가 되는 말을 듣는다던지 소외감을 느끼는 상황들이 허다했다. 서러움이 밀려올 때마다 선배들의 격려가 그를 버티게 했다. 


“박상면 선배님이 한창 활동을 많이 하실 때, 제가 오디션에 합격해서 현장에 갔어요. 그 때 긴장을 많이 했었나봐요. 계속 NG를 내니까 촬영감독님이 ‘(저) 배우 연기 안 된다’고 혼잣말을 하셨어요. 순간 자괴감에 빠졌죠. 대기실에 있는데 박상면 선배님이 ‘이름이 뭐냐’고 물으시더니 ‘이빨 꽉 깨물고 참고 견뎌. 잘 할수 있어!’라고 하셨어요.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해요.”

선배들의 응원대로 정우는 무명 시절의 기억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날을 맞았다. 하지만 한 순간 주목 받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지기도 하는 것이 스타의 숙명이다. 그 점을 잘 알면서도 정우에겐 조급한 기색이 없다. 실 생활도 연기 생활도 ‘천천히 느리게’가 모토가 됐기 때문이다.

“천천히 느리게 가는 배우이고 싶어요. 제가 빨리 가고 싶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아직은 부족한 게 많으니까 한 작품 한 작품 배워나가면서 하고 싶어요. 벌써 30대 중반이라 ‘언제 배워서 언제 할래?’ 그러면 할 말은 없지만, 상업영화 주연으로선 이번이 첫 작품이니까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 보다, 우선은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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