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미래 ‘열혈감독’ 4인에 물어봐!

‘흥행감독 산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신인감독 4인방

’88만원 세대’의 신인 영화감독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했다. 이제 막 수업을 마치고 영화계를 노크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보고 싶었다. 이들이 만들 5년 후 혹은 10년 후 한국 영화의 모습은 어떨까. 김의석 박종원 장현수 박기용 임상수 허진호 봉준호 장준환 최동훈 이재용 등 1990년대에서 2000년대 한국 영화의 ‘문제적 흥행 감독’을 배출한 한국영화아카데미(원장 박기용)를 찾았다. 25주년을 맞은 한국영화아카데미는 기발한, 회심의 프로젝트를 개발했다. 졸업생들에게 적게는 몇 천만원, 많게는 1억원을 쥐여주고 장편 영화를 찍어보도록 한 것이다. 보통 단편 영화이게 마련인 ‘졸업작품’ 수준이 아니라, 일반극장에서 상영하는 어엿한 개봉작이자 각자의 데뷔작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제작 연구 과정’이라고 이름 붙여진 프로젝트의 첫 결과물인 4편의 영화가 지난 12일 개봉했다. 백승빈의 ‘장례식의 멤버’, 이숙경의 ‘어떤 개인 날’, 고태정의 ‘그녀들의 방’, 이은미 외 4인의 애니메이션 ‘제불찰씨 이야기’ 등이다. 이 4편의 작품은 부산·베를린 등 유수국제영화제에서 초청장을 받아들었고 수상 성과도 있었다. 이들의 ‘첫 경험’은 황홀하지는 않았지만 뜨거웠다. 따끈한 신작을 낸 따끈한 신인들, 이숙경(44) 고태정(35) 백승빈(32) 이은미(30) 감독을 만났다.
 

▶”영화계라고 다르나요? 다들 알바로 버텨요”
 
‘괴물’의 봉준호, ‘타짜’의 최동훈 등 걸출한 감독들을 배출하면서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스타 감독의 산실로 떠올랐다. 영화지망생 사이에서는 입학이 어려운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곳을 졸업한 패기만만한 젊은 감독들도 불황의 깊은 골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고태정 감독은 “예전에는 촬영에 들어갔다가 ‘엎어지는(제작 무산)’ 작품이 많다고 했는데 이제는 아예 들어가는 영화가 없다”고 말했다. 백승빈 감독은 “같이(22기) 연출 과정을 전공한 9명 중 그나마 제작 지원을 받아 독립 장편을 만들거나 연출부 조감독으로 들어간 친구는 2~3명에 불과하다”며 “다들 알바(부업)로 버틴다”고 전했다. 아카데미의 재학생들은 고교 졸업 후 바로 입학한 이들보다는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다가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위해 들어온 지망생들이 많다. 영화로 생계를 해결하기 어려우니 “그동안 저축해놓은 돈을 기약없이 축내거나 그나마 수입이 쏠쏠한 웨딩 촬영 같은 부업으로 용돈벌이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들은 다른 직종의 정규직을 구할 수도 없다. 그러다가는 어렵게 노크한 영화판을 아예 떠나게 될까 두려워서다. 
 

▶우리의 이름은 ‘디지털·다양성·이야기’
 
이들 중 가장 뒤늦게 영화계에 입문한, 맏이격 신인은 이숙경 감독이다. 인터넷 사이트 ‘줌마네’로 대표되는 여성운동에 오랫동안 투신했고, 잘나가는 강사이자 방송인으로 활동하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작가 마르케스가 자서전에서 ‘이야기하기 위해 산다’고 했듯,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망과 이야기의 힘”을 영화 입문 동기로 밝혔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디지털의 존재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아줬다. ‘어떤 개인 날’은 작가이자 강사인 한 이혼녀의 자기 발견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 작품. 마흔을 앞둔 한 주인공이 기업체 강의를 하러 지방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같은 방을 쓰게 된, 또 다른 이혼녀이자 걸쭉한 소리꾼과의 만남을 그렸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매우 일상적인 사건을 다뤘지만 내밀하게 배치된 드라마와 대사나 제스처, 풍경을 통해 숨겨둔 감성을 끄집어내고 날카롭게 자극하며 따뜻하게 위로한다.
 
세대는 다르지만 이 여성의 드라마는 고태정 감독의 ‘그녀들의 방’과 마주하는 느낌을 준다. ‘그녀들의 방’은 오직 고시촌 쪽방에서의 탈출을 꿈꾸며 고단한 삶을 사는 학습지 일일교사와 사고로 남편ㆍ딸을 잃은 한 여성 기업인의 우연하고 기이한 만남을 그렸다. 두 여성 감독의 작품 모두 결핍을 메워가려는 여성과 상처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남성 중심적인 성담론을 비판하고 여성적인 욕망과 사회적 지위를 주제의 중심으로 끌어온 과거의 여성주의 영화와는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백승빈 감독의 ‘장례식의 멤버’는 한 장례식에 모였지만, 서로 낯선 한 가족의 이야기다. 양성애자인 중년남자, 그의 부인인 교사, 그들의 딸이 죽은 한 남학생과 맺었던 모종의 비밀스러운 관계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블랙코미디이자 스릴러다. 호러와 코미디, 드라마, 미스터리 등 장르를 섞어내는 솜씨와 문학적인 이야기 전개가 돋보인다.
 
이은미 감독이 동기 4명과 공동 연출한 ‘제불찰씨 이야기’는 이구소재사(귀청소부)라는 특이한 직업의 주인공을 내세운 일종의 SF 판타지 애니메이션. ‘제 불찰입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소심하고 평범한 한 젊은이가 자본가와 의사의 음모로 귀 청소하기에 좋도록 신체가 작아지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의 뇌에 들어가 콤플렉스를 엿보게 된다는 이야기. 가수 이적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한국영화, 그래도 미래는 지속된다
 
이들은 모두 다른 길로부터 영화로 입문했다. 백 감독은 영문학을 전공한 뒤 입시학원 강사로 일했다. 이은미 감독은 대학 졸업 후 금융회사에 다니다가 좋아하는 그림이나 더 그리고자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과정에 지망했다. 고태정 감독만이 그나마 영화에 인연이 좀 있었다. 법학을 전공한 후 “영화를 하면 돈을 많이 주는 줄 알고” 그저 생계형 직업으로 영화마케터로 잠시 일했던 경력이 있다.  한국 영화의 영화감독의 흐름은 대략 80~90년대를 거치면서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공부를 하던 세대, 각종 영화 소모임(시네마테크)에서 화질 나쁜 비디오를 보던 세대를 거쳐 누구나 왕자웨이나 쿠엔틴 타란티노를 동경하던 한때를 지나왔다.
 
지금 신인 감독들은 어떨까? 적어도 아카데미 출신 4명의 신인 감독들은 이전 세대와는 또 다른 취향과 지향을 보여준다. 전세대보다는 마니아적 취향이 덜하지만 자기 세대의 일상과 사적인 이야기에 훨씬 더 큰 재능과 집중력을 보여준다. 할리우드 영화는 물론 영화사 걸작이나 난해한 작가주의 작품 어느 것이나 원하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시대, 누구나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세대, 젊은 감독들은 영화를 숭배나 열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자기표현과 이야기, 의사소통의 매체’로 본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국내 애니메이션은 미국 일본의 하청시대를 지나 한때 제2의 디즈니나 재패니메이션 같은 지향이 지배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은미 감독은 “대규모 자본이 투여되고 현란한 기술이 쓰이는 작품은 국내 제작 여건상 한계도 있고 국제무대에서 승부를 걸기도 어렵다”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력과 사람 손이 창조할 수 있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우리만의 독자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꿈”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숙경 감독의 머릿속에는 40~50대 중년 남성의 이야기나 노년의 빼어난 멜로를 만들 생각으로 가득하다. 백승빈 감독은 차기작으로 호러물을 구상 중이다.
 
고태정 감독은 “우리는 한국 영화 거품이 빠지고 체질 개선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영화계에 뛰어들었다”며 “가뭄으로 고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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