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학에 입학한 딸 아이는 백보 천보를 양보해도 철부지 어린애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넌 아직 베이비”라고 놀리면 가장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다.뭣보다 세상 돌아가는 데 도통 관심도, 지식도 없는 듯 싶은 구석이 스무살에서 두해 모자라는 딸애를 세살박이로 여길 수 밖에 없는 첫번째 근거이다.
그런 아이에게 요즘 한국에서 뜨겁게 논란이 되고 있는 영어교육 개혁 문제를 대충 설명해주었다. 뜻밖에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는 자세를 보인다. 여간 신통하지 않다. 은근히 모처럼 이뤄진 딸과의 대화에 신바람이 난다.
수년전 초등학교를 마치고 이민왔다가 3년 정도만 LA에서 중고교를 다니고 집안 사정으로 한국에 돌아간 뒤 지금은 외국인학교의 영어 교사로 안착한 딸애의 사촌 언니 이야기를 상기시켜주었다. 딸 아이는 “오…”하면서 감탄사인지 뭔지 모를 탄성까지 내뱉는다.
당장 아침 신문에도 영어교육 개혁 시행방안의 하나로 급기야 군복무를 대신하는 ‘영어교육 요원’제도까지 등장했다. 새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대로 2010년부터 1,400여 일반계 고교의 영어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려면 가장 시급한 과제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교사 충원이다.
현재 한국의 일반계 고교의 영어교사는 1만 5천여명. 그 가운데 절반 정도는 주당 1시간 이상 영어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게 한국 교육부의 조사결과라고 한다. 그렇다해도 주 5~6시간에 이르는 영어수업을 모두 영어로 가르쳐야 한다면 그만한 강의능력을 가진 교사 인력 수요는 보조 교사까지 포함, 1만명 이상으로도 모자라지 않을까 싶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3세계 원어민 강사 활용방안까지 논의되고 있는 판이다. 결국 해외 유학생과 미국에서 자라고 공부한 1.5세, 나아가 딸 아이같은 2·3세 코리안 아메리칸이야말로 한국의 영어교육 개혁에 필요한 주요 인력공급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영어 전문 교사 양성과정인 테솔(TESOL) 자격증 소지자에 대한 영어교사 취업허용 문호 개방도 검토되고 있는 만큼 그같은 자격 시스템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미국내 한인들로서는 새로운 취업시장으로 한국 새정부의 영어교육 개혁을 바라볼 만하다.
해마다 미주 한인 가운데 500명 정도만 한국의 영어지도 교사로 취업한다고 쳐도 한국의 고교교사 1년차 연봉이 대략 3천만~4천만원 정도이니 최소한 연간 1천5백만~2천만달러에 해당하는 ‘원화수입’이 창출된다. 테솔 학원 등 관련산업이 성업하게 되는 부가가치까지 따지면 한국의 영어교육제도 변화가 가져올 미주 동포사회의 경제적 효과는 결코 무시할 게 못된다.
내친 김에 딸애에게 “너도 나중에 한국에서 영어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수도 있으니까 신경써봐라”고 덧붙였다. 놀랍게도 아이는 고개까지 끄덕거린다. 모처럼 아빠라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뭔가 와닿는 게 있다는 표시다. 그러자 도리어 딸애에게 그런 말을 한 게 후회스러워진다.
미국에서 공교육의 전 과정을 다닌 아이를 상대로라면 주류사회의 글로벌한 직장에 진출해서 보다 큰 뜻을 펴도록 격려해줘야 마땅하다. 더 몹쓸 것은 딸에 대한 기대치를 은근히 낮추고 있는 ’자식 평가절하’ 심리다.
천만다행으로 딸애는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로 금세 되돌아가 잠시 빼둔 아이팟 이어폰을 다시 귀에 끼우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한국에서 영어 가르치는 원어민교사 자리를 훗날 취업의 대안(인슈어런스)처럼 생각하라고 했으니 애비라는 작자의 저의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극히 속물스럽기 만하다.
그래도 한국의 영어교육방식이 개혁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 딸과 그 친구, 친구의 친구, 선후배들이 두루 혜택볼 수 있지 않겠는가. 까짓 속물 근성이야 내 캐릭터 문제일 뿐이니까….
황덕준/미주판 대표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