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집 짓고 고치는 일을 하고 있는 목사입니다(웃음)”
목사가 목회는 하지 않고 목수일을 한다니… 첫 만남에 다소 당황스러운 자기소개다. 목수가 되기 까지, 그리고 목사가 되기까지 결코 순탄한 삶은 아니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세상을 섬기길 원하는 핸디맨 목사, 한성희 목사를 성탄을 즈음해 만났다.
한성희 목사가 ‘기술’을 배운 것은 해군에서였다. 선박과 엔진파트 수리일을 맡았던 그는 군생활 동안 화려한 기술을 연마했다. 덕분에 제대 후에는 국가방위산업체에도 취업할 수 있었고 스페인까지 파견되는 국가대표급 엔지니어였다. 스페인 선박회사로 직장을 옮긴 후 그는 스페인 이민자로 16년을 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두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보내는 등 여유롭게 살았다. 아내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아내를 따라 교회를 오가곤 했다. 당시 스페인에 한인교회가 곳곳에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교회 짓는 일을 하게 됐고 나중에는 아예 그게 전업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술먹고 놀기 좋아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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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스페인 라스팔마스 지역을 대표하는 한인교회 ‘라스팔마스 순복음 한인교회’를 비롯해 1990년대 당시 지어진 개척교회들은 거의 한성희 목사의 손에 지어졌다. 큰 아들은 목사가 되겠다고 미국에서 신학대에 진학했다.
모든것이 순조롭게 보였다.
”어느날 아들이 전도사로 다니던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아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전도를 다녀오던 중이었다고 했다. 24살이었다. 그것도 하나님 일을 하던 아이를 데려다시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때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후 그의 삶은 통째로 흔들렸다. 이민생활도 지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가족들은 교회를 다녀 재수가 없는 거라고 그를 멀리했다. 모든게 의문 투성이었다. 그는 아들이 꾼 꿈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아들이 공부하며 살았던 미주리 스프링필드에서 답을 찾고자 96년 다시 이민을 결심한다.
”그곳에 가서 알았다. 아들의 소원이 아침마다 나와 아내의 기도를 듣는 것이었다고. 아들의 유언처럼 느껴졌었고 결국 아들이 만났던 하나님은 나와도 동일하게 만나주셨다. 99년 신학을 시작했고 2000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생계는 역시 교회며 기도원을 짓고 이것 저것 뚝딱뚝딱 고치는 것으로 항상 채워주셨다. 나는 핸디맨 목사였다(웃음)”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의 목적이 아니었다. 양복입고 넥타이 메고 점잖게 설교하기 보다는 망치와 못를 들고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다녔다. 강대상이 아닌 지붕 위에서, 때로는 막힌 배수구를 뚫으며 하나님을 전했다. 수리할 곳이 있으면 고쳐주고 걱정이 있으면 들어주고 상처가 있으면 보듬어 주었다.
수리비를 받을 만하면 받고 아니면 그만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교회목회가 아닌 세상목회, 섬기고 싶은 것은 내 교회가 아닌 세상이다. 나이 65세가 되어서야 소망을 갖게 된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떻하나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을… 20대 군에서 ‘기술’을 배우게 하시고, 30대에 스페인에서 ‘교회’짓는 법과 ‘스페인’어를 배우게 하셨다. 그리고 40세때 가장 귀한 것을 내려놓게 하시고 50에 주의 종으로 부르셨다. 60대인 지금 나에게 ‘준비’하라 하신다. 진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한성희 목사는 멕시코 선교를 준비하고 있다. 그곳에 가서 교회를 짓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사명이라 생각한다. 먼저 간 아들이 꿈꾸었던 선교사의 길을 이제 아버지가 가려하는 것이다.
지난 밤 비로 교회 앞에 낙옆이 많이 떨어졌을거라며 주일예배 전에 치워야 한다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며 한성희 목사는 걱정되는 듯 한마디 건넨다.
”성탄절에는 큰 교회 유명한 목사님을 인터뷰 해야하는 것 아닌가? 나같은 사람을….”
그리고 보니 예수님의 직업도 목수셨다. 내년 성탄에는 멕시코에서 교회를 짓고있는 한성희 목사를 꼭 다시 만나고 싶다.
하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