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인이자 중요무형문화재 기ㆍ예능 보유자인 김금화(83) 씨의 일생을 그린 영화 ‘만신’(감독 박찬경)의 마지막은 짧은 한 문장의 자막으로 맺는다. “굿 보러 간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고 1930년대를 증언하는 천경자 화백의 말이다. 당대 한국인들은 ‘활동사진’을 영사기가 펼치는 하나의 ‘굿판’으로 여겼다는 이야기다. 그 말은 하나의 예언이었을까? 아닌 게 아니라 2000년대 이후 우리 극장의 풍경은 ‘굿판’의 방불케 했다. 도처에 억울한 죽음이 있었고, 영화는 처절한 슬픔을 재현했으며, 관객들은 함께 웃다가 울다가 했다. 한국영화의 중요 흥행작들의 드라마 중심에는 ‘비극’이 있고, 죽음과 이별의 회한의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배우들은 죽은 자의 한을 풀고, 산 자에게 복을 나누는 현대판의 무당이었다. 김금화 씨가 쓴 수필집 제목 중 하나는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다.
영화는 굿이라고 한다면 그 중에서도 ‘씻김굿’일 터다. ‘씻김굿’은 죽은 이의 한과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어 극락으로 보내기 위한 예식으로 전라남도 지방의 굿을 이른다. 경상도의 ‘오구굿’, 함경도 지방의 ‘망묵이굿’이 같은 뜻이며, 김금화 씨가 능한 황해의 ‘진오귀굿’도 마찬가지다.
‘만신’은 큰 무당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영화 ‘만신’은 김새론과 류현경, 문소리가 각각 열서너 살, 열일곱 살, 중년의 김금화를 연기하는 드라마와 김금화 씨의 인터뷰 및 공연, 지인들의 증언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를 결합시켰다.
일제강점기,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김금화는 아들을 고대하던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나 ‘요 다음에는 아들이 넘석한다(넘본다)’는 뜻의 ‘넘세’로 불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넘세는 천진한 얼굴로 서늘한 예언을 읊어대 손가락질을 받았고 눈을 감으면 방울소리가 들리고, 무시무시한 ‘대감들’이 지나다닌다며 이유없이 앓았다. 일제의 위안부 동원을 피하기 위해 넘세는 13살에 혼인하지만, 시집의 모진 구박을 견디다 못해 3년 만에 친정으로 도망친다. 결국 열일곱에는 굿을 통해 신내림을 받는다. 꽃다운 열일곱의 강신무가 올라탄 서슬 퍼런 작두는 생과 사의 갈림길이자 천당과 지옥의 경계이고, 신들의 농간과 모진 세속의 삶 사이에서 한 여인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외길로서는 더없는 상징처럼 보였다. 김금화는 죽은 자는 억울하고, 산 자는 가위눌려야 했던 우리 현대사의 생과 사, 신과 인간, 남과 북을 넘나들며 굿판을 펼쳤다. 신내림을 받기 전엔 전근대기 여인의 수난을 온 몸으로 겪었고, 한국전쟁 때는 남에선 ‘빨갱이’, 북에 가면 ‘반동’, 간첩질하는 무당으로 고초 겪기 일쑤였다. 유신시대 새마을운동 때는 혹세무민하는 미신으로 내몰렸고, 기세 높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사탄’으로 손가락질 받았다가, 쿠데타로 집권해 정통성을 확보해야 했던 5공정부는 때 아닌 국가적 잔치판(‘국풍’)을 벌여 무속을 ‘전통’으로 떠받들고 TV도 무당을 수시로 불러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역사의 굴곡과 함께하며 곡절 많은 인생을 산 무당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대구 지하철 참사, 천안함 침몰 사건 등 유난히 죽음이 많은 우리네 우리 시대 나라의 만신이 돼 죽은 자를 위로하고 산 자들의 복을 기리는 씻김굿을 해왔다. 김금화의 굿뿐이랴. 우리 한국영화 또한 현대사의 굽이굽이 억울한 원혼들을 스크린으로 불러내고 산 자들을 위로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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