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이범수는 연기 경력 25년 차의 베테랑 배우가 됐다. 1990년 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데뷔, 10년 가까이 단역과 조연 생활을 거친 뒤 주연 배우로 올라섰다. 오랜 시간 연기한 만큼 부침을 겪을 법도 한데, 이범수는 여전히 20-30대 배우 부럽지 않은 활약 중이다. 최근 드라마 ‘총리와 나’(2013), ‘트라이앵글’(2014)을 보면 이범수는 40대 중반에도 ‘멜로가 되는’ 몇 안 되는 배우이기도 하다.
안방극장 팬들의 사랑에 안주하지 않고 그는 또 한 번 도전했다. 스크린으로 무대를 옮겨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의 악역으로 기억될 ‘살수’로 돌아왔다. 배역을 준비한 과정을 들으며 그 진정성을 엿보고 나니, 이번 도전 자체가 이범수 연기 인생의 ‘신의 한 수’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내가 진짜 악당같아 보이나?’ 끊임 없이 고민했다. 전체적으로 영화를 긴장감 있게 만드는 것은 감독의 몫이지만, 배우 역시 자신이 등장했을 때 긴장감과 몰입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신의 한 수’의 이범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악역 캐릭터를 위해 “한 컷 한 컷 고민하지 않은 컷이 없다”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
▶착수(着手): 바둑에서 처음에 돌을 벌여 놓는 일=“단 3쪽만 읽고도 감이 왔다.” 처음 시나리오가 들어왔을 때 이범수는 ‘과연 바둑과 액션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의아했다. 매니저에게 시나리오를 건네 받을 때까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고. “갸우뚱하면서 첫 장을 넘겼는데 ‘이건 되겠다’ 싶은 감이 왔다. 무엇보다도 재미 있었다”고 그는 털어놨다.
게다가 ‘살수’라는 인물이 순도 100%의 악역이라는 점도 이범수의 마음을 흔들었다. “조폭영화의 악당두목과 같은 뻔한 악역은 하고 싶지 않았다. 또 ‘짝패’ 때 이미 악역을 했었기 때문에 비슷한 악역도 피하고 싶었다. ‘짝패’ 속 필호는 어린시절 콤플렉스 때문에 폭력적으로 변한 인물이다. 살수는 과거에 대한 부연 설명 없이 ‘절대악’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이범수는 ‘살수’라는 바둑돌이 되어 바둑판 위에 올랐다.
▶포석(布石): 전투를 위해 진을 치다=영화 촬영이 시작되면서 이범수는 바둑알을 늘 가지고 다녔다. 바둑알을 내려놓는 ‘착수’ 동작이 어색한데 바둑고수 연기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바둑알이 손에 익숙해지도록 이범수는 카페든, 촬영장이든, 어디서든 탁자 위에 바둑알 내려놓는 연습을 했다.
“바둑이 신선놀음처럼 평온해 보이지만, 머릿속에선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고 죽이겠다고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바둑알을 내려놓는 손동작이 부드럽고 우아할 수록, 상대방을 해치려는 속내와 극단적인 대비를 이룰 것이라 생각했다.”
바둑돌을 내려놓는 연습이 끝이 아니었다. 이범수는 베테랑 연기자답게 ‘디테일’까지 보탰다. 대개 검지와 중지로 바둑알을 내려놓는다면, 이범수는 우아한 손동작을 위해 중지와 약지를 쓰는 쪽을 택한 것이다. 고민 끝에 살수 캐릭터에 어울리는 착수 손동작이 완성됐다.
▶묘수(妙手): 기가 막히게 좋은 수=사실 이범수는 작품을 선택할 때가 아닌, 선택한 뒤부터 고민하는 배우다. ‘어떻게 하면 살수가 뻔하지 않은 악역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악인처럼 보일까’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고민을 거듭했다. 마침 떠오른 묘수는 ‘무테 안경’이었다.
“과거 야구선수 중에 타자인데 안경을 쓴 선수를 보면서 자신감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안경을 쓰고 싸운다는 건 자해나 다름 없는데, 그런 살수의 외관을 통해 자신감 넘치고 강한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던 ‘전신문신’도 이범수의 아이디어다. “가끔 사우나에서 문신 있는 분들을 보면 섬뜩한데 전신문신은 어떻겠나. 살수는 누가 봐도 혐오스러운 인간이다. 그 혐오스러움, 이질감을 시각적으로도 표현하고 싶었다. 흉터나 화상 등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인위적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전신문신을 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계가(計家): 승패를 가리기 위해 집 수를 셈하는 일=주사위는 던져졌다. ‘신의 한 수’가 지난 2일 개봉해 관객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바둑에서 대국이 끝난 뒤 계가하듯, 영화판에서도 굳이 승패를 따진다면 그 기준은 ‘흥행 여부’가 될 수 있다.
이범수는 이미 다수의 드라마에서 흥행 재미를 톡톡히 봤다. ‘온에어’(2007), ‘외과의사 봉달희’(2008), ‘자이언트’(2010)를 연달아 히트시키며 ‘시청률 제조기’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영화에선 ‘대박’이라고 할 만한 흥행작은 없어, 이번 영화에 대한 기대가 남다를 법도 하다.
이범수는 “흥행에 연연하지 않는 배우가 있겠나”라고 되물으면서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ㆍ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이라 하지 않나. 시청률이나 흥행을 떠나 작품이 완성도 있다면 만족한다. 그런 면에서 ‘신의 한 수’는 만듦새가 깔끔해 관객들이 좋아할 거라 생각한다. 예상이 빗나가더라도 출연진이 다들 흡족해 했기 때문에 (흥행에 실패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고 초연하게 답했다.
<이범수 인생의 ‘신의 한 수’는…>
어떤 결정을 내릴 당시에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결정이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범수의 인생에선 그 ‘신의 한 수’가 배우의 삶을 택한 것이었다.
“배우가 됐기 때문에 이런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배우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배우라는 직업을 택한 것 자체가 내 인생의 ‘신의 한 수’였다.”
특히 이범수의 필모그래피에서 ‘신의 한 수’가 된 작품은 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와 ‘자이언트’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이범수를 여성 팬들과 한층 가까워지게 했고, 멜로 장르에 대한 가능성도 열어줬다. ‘자이언트’ 역시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범수에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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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끝에 이범수는 자신감과 기대감이 깃든 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번 영화의 살수 역할이 내 배우 인생의 ‘신의 한 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