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는 84년 데뷔곡 ‘비내리는 영동교’를 비롯해 ‘신사동 그 사람’ ‘짝사랑’ ‘잠깐만’부터 백지영과 왁스가 부를만한 데뷔 30년 음반의 발라드곡 ‘빗속에서’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주현미가 ‘비내리는 영동교’와 ‘신사동 그 사람’을 히트시켰던 80년대만 해도 트로트계에서 혁신적이라고 했다. 이미자로 대변되는 ‘한(恨)의 트로트’와는 본질이 달랐다. 기존 트로트계에서의 주현미의 등장은 ‘흥(興)의 트로트’인 장윤정의 ‘어머나’ 못지않은 메가톤급 웨이브로 와닿았다.
주현미는 ‘비내리는 영동교’와 ‘신사동 그 사람’을 간드러지게 부른다. 다른 사람이 이런 창법을 구사하다가는 퇴폐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목소리가 청량하고 밝아 오히려 세련되고 표현력이 좋은 트로트라는 반응이 많았다. 그러면서 섹시한 목소리는 유지했다.
이어 히트한 ‘짝사랑‘ ‘잠깐만’은 트로트라기 보다는 스윙이나 디스코, 16비트라 할 수 있어 당시에도 ‘신트로트’로 불렸다.
주현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트로트라는 장르에 매달리지 않았다. 우리 것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노래가 전통가요이지만, 트로트를 하는 데 한계도 느꼈다고 한다. 쉬운 멜로디, 일상의 편안한 가사를 기반으로 해서 다양한 장르의 후배들과도 끊임없이 교류했다. 조PD나 소녀시대 서현, 심지어 사이키델릭 밴드 국가스텐과도 콜라볼레이션 작업을 통해 후배들과 소통해나갔다. ‘꽃보다 할배’ OST도 불렀다. 주현미는 “후배들과의 작업을 통해 틀에 박히지 않는 자유로움과 도전 정신을 배웠다. 아들뻘 되는 후배가 선생님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주현미는 트로트 가수가 아닌 가요를 부르는 가수가 됐다. 이번 앨범도 팝 성향이 훨씬 더 강하다.
선배가수들이 후배들과 콜라보레이션을 자주 갖는다고 해서 현재의 가수가 되는 건 아니다. 주현미는 각고의 노력으로 과거 가수로 머무르지 않았다. 자신의 스타일을 요즘 노래와 접목시키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감정을 소화하는 폭과 깊이가 더해지면서 음악 소화력이 더욱 좋아졌다. ‘빗속에서’는 소몰이형 창법으로 울어댄다고 해서 애절해지는 게 아니다. 주현미는 울지 않아도 충분히 애절함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에코브리지와 함께 ‘빗속에서’를 작곡한 정엽은 “‘빗속에서’는 쉬운 곡이 아닌데도 얼마나 빨리 자신의 곡으로 소화하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이번 음반 타이틀곡인 ‘최고의 사랑’은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불러도 충분히 호소력을 발휘한다. 이런 게 30년 노래를 한 주현미의 장기다.
주현미는 내면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온 농후함은 전통가요의 기품과 감성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지만, 그녀의 끼와 매력을 빛내는 또 다른 변화와 도전을 통해 중년들만의 트로트가수가 아닌 전 세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현재진행형 가수로 변모했다.
주현미에게 요구하고 싶은 한가지는 중국시장에 진출하라는 것이다. 그는 화교 출신으로 중국말을 할 줄 아는데다, 중국인의 감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가수다. 지금까지 욕심이 없는 가수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번 앨범은 중국어로 번역해 발표하고 싶다고 했다.
중국 등 해외 언론이 한국 대중가요에 대해 비아냥조로 쓰는 기사중 하나가 “한국에는 아이돌의 댄스음악(EDM)외에는 없냐”는 것임을 감안할 때 주현미 같은 다른 장르의 음악을 중국에 진출시킨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주현미가 중앙대 약학대 재학 시절에는 밴드의 보컬을 맡아 록 감성도 있다.
아직 중국에 진출하지 않고 있는 주현미는 약간의 매니지먼트와 프로모션이 가미되면 중국에서 충분히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장르의 가요를 부르는 주현미가 중국에 진출한다면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한 면이 소개될 여지가 있다. 주현미가 활동 폭을 더 넓혀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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