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은 건 ‘영화’ 뿐이다. 그 시절 영화 만이 관객들을 옛 추억에 데려다줄 타임머신이 된다. A 영화를 볼 때면 영사 사고가 벌어졌던 웃지 못 할 소동이 생각난다. B 영화는 손 맞잡고 봤던 옛 애인을, C 영화는 상영 도중 화장실이 급해서 당황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추억의 영화들이 앞다퉈 스크린에서 부활했다. 지난 달 20일 ‘메멘토’(2000)와 ‘테스’(1979)가 디지털 리마스터링(기존 필름 영화를 보다 선명한 디지털 포맷으로 복원) 돼 개봉한 데 이어, 4일에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피아노’(1993), ‘퐁네프의 연인들’(1991) 등 세 편이 새 단장해 출격했다. 특히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경우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을 국내에서 최초 개봉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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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재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
▶역대 재개봉 영화, ‘상영 재미 쏠쏠하네’=추억의 명화 재개봉은 지난 해부터 활발하게 이뤄졌다. 지난해 2월 재개봉한 ‘러브레터’(1999)가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의 청초한 미모와 ‘오겡기데스까(잘 지내시나요)’라는 대사가 화제를 모으면서, ‘러브레터’는 국내에서 개봉한 일본영화 중 최초로 유료 관객수 100만 명을 모았다. 당시 추억을 공유한 중장년층 관객들이 스크린 앞으로 모이면서 재개봉 때도 4만5000여 명(상영관 180여 곳)의 관객 수를 기록했다.
그해 4월 재개봉한 ‘레옹’(1994)은 160여개 관에서 4만2000여 명을 불러모으며 흥행 바통을 이어받았다. 통상 재개봉 영화의 손익분기점이 1만5000명~2만 명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러브레터’와 ‘레옹’ 모두 손익분기점에서 2-3배 수익을 더 낸 셈이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으로 친숙한 명작 ‘시네마 천국’ 역시 141곳 상영관에서 관객 수 2만7000여 명을 기록하며 손익분기점(3만 명)에 근접했다.
최근 재개봉한 ‘메멘토’는 5일 만에 관객 수 1만 명을 돌파했다. ‘메멘토’는 ‘인터스텔라’로 국내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을 천재 감독의 반열에 올려놓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영화 홍보사 더홀릭컴퍼니 관계자는 “‘메멘토’의 판권이 만료된 상황이라 최근 다시 구입했다”며 “놀란의 영화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데도 젊은 관객들은 접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재개봉이 추진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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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1993) |
▶‘새 옷’ 입은 옛 영화 찾는 관객 속내는?=물론 재개봉 영화의 성적이 다 좋았던 건 아니다. 대개는 잘 돼야 1만 명 남짓 모으는 수준이고, 적게는 몇백 명을 기록하고 쓸쓸히 사라지는 작품도 허다하다.
재개봉작 대부분이 이미 잘 알려진 작품이다 보니, 유행에 민감한 관객들의 흥미를 끌기란 쉽지 않다. 개봉관마저 확보하기 어려워 상영 기회를 얼마 가지지 못 하고 막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영화 수입사들이 꾸준히 추억의 영화들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뭘까.
기본적으로 재개봉 영화엔 충성도 높은 고정 수요층이 존재한다. 영화 팬이라면 개봉 당시 관람할 기회를 놓쳤던 작품을 다시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반가운 일이다. 여러 번 본 작품이라도 큰 스크린에서 선명한 화질과 깨끗한 사운드로 명작을 즐긴다는 점에서도 구미가 당긴다. 중장년 관객층에겐 재개봉 영화가 과거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반길만 하다.
한편으로 재개봉작 대부분이 작품성과 흥행성을 두루 갖췄다는 강점이 있다. 따라서 마니아가 아닌 일반 관객 입장에서도 뻔한 상업영화나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예술영화보다 더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일부 상영작의 경우 과거 삭제됐던 부분을 포함해 풀 버전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관객들을 만족시킨다. ‘퐁네프의 연인들’의 경우, 1992년 당시 삭제됐던 알렉스(드니 라방)가 보호소에서 지내는 5분 여 장면을 되살려 개봉했다. 같은 해 개봉했던 ‘연인’(1991)도 일부 장면이 삭제되거나 모자이크된 채 개봉했으나, 지난 2월 무삭제 버전으로 다시 극장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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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삭제 버전으로 재개봉한 레오 카락스 감독의 ‘퐁네프의 연인들’(1991) |
▶“줄잇는 재개봉 영화, 초코파이 인기와 마찬가지”=디지털 리마스터링 기술이 발전하면서, 명작 재개봉이 영화시장에서 하나의 틈새시장으로 자리잡은 분위기다. 영화 수입사의 입장에선 소위 ‘대박’도 어렵지만, 밑지는 장사도 아니다. 국내 관객의 반응을 예측하기 어려운 새 영화의 판권을 사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비용이 절감되는 옛 영화를 재개봉하는 것이 위험 부담이 덜할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제목과 감독, 출연진이 포진해 있다는 점에서 홍보에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 또한 매력적이다.
극장에서 수지가 맞지 않아도, IPTV나 VOD서비스와 같은 부가판권 수입으로 이를 어느 정도 맞출 수 있다. 영화 홍보사 한 관계자는 “재개봉 외화들이 대체로 부가판권 수익을 노리는 부분이 크다”고 귀뜸했다.
다만 대다수 관객들은 여전히 신작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재개봉 영화로 수익을 내는 일이 녹록치 만은 않다. 영화 수입·배급사 오드(AUD)의 김시내 대표는 “재개봉작이라고 해도 인지도 높은 흥행 영화들, 영화사에서 의미있는 고전의 경우엔 신작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며 “상영관도 신작들 위주로 정해지기 때문에 개봉관을 잡는 것도 전쟁”이라고 토로했다. 부가판권 수익도 개봉 시 홍보가 잘 된 경우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재개봉 영화들이 꾸준히 등장하는 데 대해 김 대표는 “소비자가 꾸준히 초코파이를 찾는 것과 같은 의미”라며 “한국영화, 외국영화를 떠나 비디오나 TV로 봤던 고전 영화들, 좋은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다시 보고 싶어하는 수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