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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리’는 한인타운의 택시드라이버다. 정확하게는 야간 대리 운전 기사, 그래서 자칭 ‘김대리’다. 그의 나이 45세. 아내와 두 아들을 가진 가장이다.
미국에 온 지 3년째인 김대리는 어찌 어찌하다 서류미비자가 되었고 1년 전부터 낮에는 건강식품세일즈맨으로 일하고 밤이면 자신의 자동차에 손님들을 태우고 있다.
소설책 서너 권은 거뜬히 나올 만한 사연을 지닌 김대리의 택시에는 매일 밤 그보다 더한 사연을 가진 손님들이 오른다. 그리고 새벽 프리웨이를 달리는 택시 안에는 고된 이민생활에 지친 몸을 기댄 사람들의 ‘취중진담’이 오간다.
송년모임으로 분주한 지난 주말 저녁, 김대리의 택시에 동승했다.
2014년 12월 어느 늦은 밤, 그가 털어 놓는 한인타운의 리얼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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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운의 대리, 김대리”못 해 먹겠다”
하는 일은 어떠냐는 물음에 김대리는 기다렸다는 듯 답한다.
“LA와 OC에 한인 택시회사는 150여 개, 대리기사는 600여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 중 90% 이상이 무허가 회사이고 대다수가 임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하고 있다. 한 달에 3천불은 벌게 해주겠다는 광고로 혹하게 만들지만 그 3천불을 3~4달에 나누어 받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계속 임금이 밀리는 거다. 참고 일하든지 그만 두든지 내 선택이다. 일 하겠다는 사람은 많기 때문에 업주들은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이는 무허가 택시 회사의 고객 70%가 개인이 아닌 기업 또는 중소사업체로 일정 기간을 두고 결제를 하기 때문에 기사들에게 즉각적으로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는 설명이다. 업주들의 이같은 임금 지연, 콜비(업주가 떼는 택시요금의 15%)디파짓 강요, 콜 차별(특정인에게만 일을 몰아주고 불만을 제기하는 기사들에게는 일을 주지 않는 행위) 등은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의 대리운전사들을 벼랑 끝으로 모는 행위라고 하소연한다.
“기사들은 대부분 신분도 불안정하고 직업도 변변치 않아 투잡, 쓰리잡 뛰는 사람들이다. 그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니 더 억울한 것이다. 노동국에 고소하라고? 불법체류 신분에 일했다는 증거도 없는데? 뭐 악덕업주들만 욕할 게 아니다. 술 취한 진상 손님들의 행패도 만만치 않다. 수퍼갑질은 비행기가 아닌 택시 안이 아마 제일 심할 거다”
김대리는 기사들 사이에 악명 높기로 유명한 한 지상사 임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S사 000부장님. 제발 택시타면 술 취한 척 하지 마시고 팁 주세요. 5불, 10불이라고 아끼고 싶죠? 우리는 5불, 10불이라도 받아야 먹고 삽니다! 거 알만한 분이 그렇게 살지 마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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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술 좀 그만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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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리의 택시를 이용하는 단골 손님 중에는 유독 ‘아가씨’들이 많다. 여기서 ‘아가씨’는 저녁에 출근 해 새벽에 퇴근하는 유흥업소 여성들을 말한다.
오렌지카운티에 거주하는 22세의 제니(가명)도 김대리의 단골고객 중 한 명이다.
“몇 달, 오래는 몇 년을 출퇴근을 시켜주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지고 가끔은 우리를 아저씨라 부르며 신세한탄을 늘어놓기도 한다”
제니는 요즘 상한 치아 때문에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매일같이 술을 먹으니 이가 상할 데로 상해버렸다고. 같은 일을 하는 아가씨들 대부분이 잇몸질환을 앓고 있다고.
김대리에 의하면 OC지역에는 소위 룸살롱이라 불리며 성업중인 곳이 6개 정도, 여기서 일하는’아가씨’들만 1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 40% 정도는 LA에서 원정을 오는 아가씨들이다. 이들은 한달에 6천~7천 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리지만 대부분을 명품구입과 성형수술비용으로 지출해 늘 자신들이 궁핍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유흥업소로 나가기를 반복하고 있다.
“술 먹고 토하는 것도 지겹다며 한국에 있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던 제니는 무슨 이유인지 미국에서 돈을 벌어 성공해야 한다고 했다. 측은한 마음에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하니 화를 내더라. 하긴 누가 누구에게 조언을 하겠나. 내 코가 석자 인데…”
#세일즈맨 J씨의 눈물
타운에서 꽤 규모를 자랑하는 미용용품 업체의 3년차 세일즈맨인 J씨의 송년회는 흥겹기 보다 쓸쓸했다. 오랜만에 택시를 불러준 단골손님이 반가워 김대리가 먼저 인사를 건네지만 J씨는 깊은 한숨으로 답한다.
“새해에는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임금은 동결되고 회사가 직원을 30%나 감원시켰다. 친한 동료들은 다 잘렸는데 남아 있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송년회에서 사장님이 돌리는 술이 약처럼 쓰더라”
일할 사람은 줄어 업무량은 많아지지만 월급은 그대로다. 게다가 전에 없던 불경기에 회사는 언제 문을 닫을 지, 아니면 언제 해고가 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J씨의 어깨는 한없이 처져만 간다. 긴 침묵을 깨고 이번엔 J씨가 김대리에게 묻는다.
“대리는 할만 해요?”
#어느 40대 가정주부의 고백
일주일에 서너 번은 노래방에서 취한 채로 나와 택시를 이용하던 40대 주부가 있었다. 김대리는 처음엔 그저 노래방을 좋아하는 주부이거니 생각했다.
“알고 보니 노래방 도우미였다. 너무 평범해 보이는 주부여서 처음에는 나도 많이 놀랐다. 사연인즉, 싱글맘에 중학생 아이 둘을 키우면서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일이었다. 자바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지만 회사에서 비자 스폰서을 해주는 대신 월급을 1천 달러 밖에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
퇴근 후 아이들을 돌보고 잠이 들면 할 수 있는 일, 게다가 5천 달러를 벌 수 있는 도우미 일은그녀로서는 물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김대리는 빈속에 술만 마셔 속이 허하다면서 꼭 월남국수 집에 내려달라던 모습이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한인타운의 낮과 밤은 정말 다른 세상이다. 너무나 다르지만 두 세상 모두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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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그 후
야간 택시 동승 취재를 마친 며칠 뒤 ‘김대리’에게 연락이 왔다.
밀린 임금 500달러를 결국 포기하고 다른 직장을 찾았다는 것이다. 풀타임 세일즈직이고 열심히 하면 대리운전보다야 나을 거라며 2015년에는 대박을 칠 것 같은 예감이 든다며 농담까지 건넨다.
“대리 일도 그만 둔 마당에 겁날 게 뭐 있나. 다 털어 놓으니 시원하다. 한가지 더 확실하게 써 달라. 한인 분들 앞으로도 비싼 옐로우택시 대신 한인택시 타실 거 아닌가. 기사한테 팁 좀 듬뿍듬뿍 주고, 반말하지 말고, 수고한다 감사한다 한마디씩 해주시라.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실 거다!!”
하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