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란 관용구보다 이별의 후유증을 잘 표현해주는 말을 찾기 어렵더군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아무런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에 늘 새롭고 어렵습니다. 시래기처럼 말라 바스라질 것 같았던 할아버지의 손가락, 임종을 눈앞에 둔 외삼촌의 몸에서 풍기던 오래된 동물성 기름의 냄새, 염습대 위에 누워 있던 어머니의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던 이마, 화장을 마친 후 몇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뜨거웠던 한줌의 유골…….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회전칼날처럼 끊임없이 마음에 생채기를 입힐 겁니다. 그 회전칼날은 우리의 목숨을 동력으로 삼아 돌아갑니다. 우리의 죽음으로 회전칼날이 멈추기 전까지 우리는 숙명처럼 그리움이라는 흉터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음악가의 묘 화가의 묘 배우의 묘도 있겠지요/장군의 묘도 있고 무명용사의 묘도 있겠지요/당신의 묘를 찾을 때까지 날아가고 또 날아갈 거예요/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기도 하겠지요/해가 떠오르는 아침부터 별이 뜨고 달이 빛나는 밤이 올 때까지/당신을 부르며 부르며 날아가겠어요”
김창완밴드의 정규 3집 ‘용서’의 수록곡 ‘무덤나비’는 아무리 가지를 쳐내도 무섭게 자라나는 그리움의 감정을 멜로디 없이 독백으로 담담하게 전합니다. 담담하게 슬픔을 누르는 김창완의 목소리는 감정의 동요를 강요하지 않기에 더욱 처연합니다. 울음을 대신하는 것은 목소리를 닮은 배선용의 트럼펫 연주입니다. 모두 잊어버린 듯하다가고 불쑥불쑥 찾아오는 그리움의 감정은 참으로 끈질기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에 그리움마저 없다면 더욱 쓸쓸할 것 같지 않은가요?
“수천 년이 걸려도 수만 년이 걸려도/하나의 묘도 거르지 않고 이 세상 모든 묘를 찾아갈 거예요/그렇게 날아가는 동안에도/새로운 묘가 더 생길 거예요/어쩌면 내가 다녀온 묘 보다/더 많은 묘가 나를 기다릴지 몰라요/그렇게 세상은 나를 좌절시키려 할 거예요”
살다보면 끝이 뻔히 보이는데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종종 생기더군요.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든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이별을 예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할 누군가가 있는 밤은 정말 아름답지 않던가요?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도 점점 작아질지 몰라요/그래도 저는 날아갈 거예요/하루에 무덤 하나밖에 못 찾는다 해도/펄럭이는 날개가 바람에/다 닳아 사라진다 해도 날아갈 거예요/당신을 찾을 때까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말을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고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만큼은 모두에게 평등합니다. 어차피 예비된 이별이라면, 사랑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사랑하는 게 ‘개이득(아주 큰 이득을 보았다는 뜻의 은어)’ 아닌가요? 이것저것 조건을 따지며 머뭇거리는 사이에 시간은 또 저만치 흘러가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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