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운 청춘을 구로공단에서 보낸 강명자 씨의 소녀같은 웃음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위로공단’(감독 임흥순ㆍ제작 반달)에는 하루 수십 벌의 옷을 만들지만 한 벌도 사입을 수 없었던 중년 여성의 회한이 담겨 있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가난한 현실, 불투명한 미래가 두렵다’는 콜센터 노동자의 눈물이 있다. 생지옥 같은 작업 현장에서 누군가 남긴 ‘살아서 나가자’는 낙서를 잊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의 한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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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흥순 감독은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본 전시에서 한국인 최초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그는 사소한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는 감수성, 사람의 얼굴에서 세상을 발견하는 상상력,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필요한 마음을 키우는 건 교육이 아닌 예술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


미술작가 겸 영화감독 임흥순(46)은 1970년대부터 2015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일터에서 분투해 온 여성들의 땀과 눈물을 영상에 담았다. 금천예술공장에서 지역 주민들과 영화를 만들 당시,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언니를 둔 주민 연출가들의 이야기가 영화를 이루는 한 축이 됐다. 40년 넘게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어머니, 백화점 일용직으로 일했던 여동생을 둔 그에게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각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위로공단’이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뿐 아니라 이 사회의 모든 어머니, 여동생들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작품이 되길 바랐다. 완성된 작품은 국경을 넘어 세계 무대를 홀렸다. 임 감독은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 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인 최초로 은사자상을 받는 쾌거를 올렸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큰 영광인데, 아직까지 실감 못 하고 무감각한 부분이 있어요. 아무래도 당시엔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죠. 제가 평범한 직장인처럼 월급 받고 가정 꾸리는 모습을 못 보여드린 것도 있고, 상 받은 다음 날이 어버이날이기도 했거든요. 10대 시절에 어머니와 여동생, 두 사람에게서 따뜻한 감정들을 많이 느꼈고, 그 감정들이 이번 작품에 큰 원동력이 됐어요. 어머니와 여동생 뿐 아니라 한국과 아시아의 모든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을 태워서 빛을 만든 분들이죠. 그 분들이 만든 빛이 세상을 밝혔고, 저 역시 그 빛을 받고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위로공단’은 제목 그대로 열악한 노동환경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위로’와 존경을 담았다. 동시에 영화는 과거 세대에 대한 헌사를 넘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임흥순 감독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서로의 힘듦을 이해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가족, 친구, 동료들이 과거 어떤 일을 했고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지 이해하면, 그들을 이해하는 것만큼 자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 자체가 결국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영화 속 여성 노동자들이야말로 자신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신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고통과 고뇌, 실패와 좌절 같은 다양한 감정들을 깊이 느끼셨기 때문에, 이 분들의 이야기 자체가 여느 영화나 책보다 더 감동을 주는 거죠. 이분들의 이야기 들으면서, 제가 더 넓고 깊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단순히 말이 아니라 눈빛이나 표정 등이 주는 느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인 것 같아요. 제가 그분들을 만나면서 느낀 감동을 어떻게 작품에 표현하느냐가 과제였죠.”
임흥순 감독의 작품은 서사 중심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인물 없는 풍경을 오래도록 비추는가 하면, 상징적인 퍼포먼스를 담은 장면이 영화 곳곳에 배치된다. 극단적인 클로즈업이 쓰일 때도 있다. 예술가의 치기나 오만은 아니다.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거리두기’다. 언뜻 서사와 무관해 보이는 풍경에 카메라가 머무르는 것은,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을 주목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8폭 병풍이 반드시 기승전결이 있는 건 아니예요. 이것들이 평평하게 흘러가면서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죠. 여성이나 서민, 노동의 이야기를 단순히 소재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미학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편하고 익숙한 형식에 길들여진다는 건 수동적이 되는 것이고, 그 속에서 저마다의 특이성은 사라지고 획일화 된 개인들만 남을 수 밖에 없죠. 낯선 것이 두려울 수도 있지만, 반대로 쾌감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에겐 현실이 굉장히 공포스러울 수도 있지만, 익숙해진 이들에겐 무감각할 수도 있잖아요.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인 거죠.”
‘위로공단’은 형식적으로 새롭고 도전적인 면을 뛰어넘어, 스크린 속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 만으로도 진한 여운을 남긴다. 여성 노동자들이 발 딛고 선 현실의 엄혹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은 물론 쓴 입맛을 다시게 한다. 그럼에도 묘하게 희망의 기운 또한 담겨 있다. 부당한 현실에 맞서 연대하고 분연히 목소리를 내는 ‘미생’들의 강인함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카메라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도 한 몫을 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온갖 무리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이라 할 것이니,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귀하다는 것이 풀잎 위의 맺힌 이슬같은 우리 인간의 목숨 아닙니까.’ 임흥순 감독의 전작 ‘비념’(2012)에 등장하는 구전가요의 한 대목에서도 사람에 대한 그의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사람에 대한 애정, 사랑이 사람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느 순간 환경이나 주변에 대한 몰이해가 자리잡고, 죽은 자에 대한 예의나 애도도 사라져버린 것 같아요. 노동자 뿐 아니라 곤충이든 자연이든, 우리가 하찮게 지나쳐버린 것들을 바라보는 감수성과 감각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필요한 것들을 일러주는 건 교육이 아닌,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놓치고 사는 작은 것들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싶어요. 사람의 얼굴에서 세상을 볼 수도 있잖아요. 그런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은?=2013 AND펀드 BIFF 메세나펀드 선정작/2014 인천다큐멘터리포트 베스트 러프컷상/제40회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언급/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 초청/2015 제39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오브 더 월드 부문 초청/제18회 상하이국제영화제 공식경쟁 부문 초청/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은사자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