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 장애인의 날] “책 읽듯 영화가 펼쳐지더라”…장애인영화관람 르포

[헤럴드경제=이세진 기자] 입장에 앞서 안대를 꺼내 눈을 가렸다. 암흑. 두려움으로 가슴이 떨려왔다. 극장 직원의 부축을 받아 상영관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계단입니다”, “이제 왼쪽으로 한동안 걸을 거예요”, “상영관에 들어갑니다, 턱 조심하세요”, “한 칸 내려갈게요”, “왼쪽으로 몸을 틀어서 조금만 이동할게요”… . “이제 앉으시면 돼요.” 푹신한 의자에 엉덩이가 닿으니 그제야 “휴~”. 안도감이 몰려왔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19일 저녁, 장애인영화관람데이가 진행된 서울 광진구 CGV강변점이다. 

19일 저녁 서울 광진구 CGV 강변점에서 열린 ‘장애인영화관람데이’ 행사 부스. [사진=이세진 기자/jinlee@heraldcorp.com]

책 읽듯 펼쳐지는 영화…감각이 살아난다= 눈으로 보이는 게 없으니 소리에 의존해서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광고 몇 편이 지나가자, 잠시 소리가 멈췄다. 별안간 낯선 목소리가 등장했다. 화면을 해설하는 내레이터다. 극장과 영화 제작사의 로고까지 찬찬히 묘사하는 목소리가 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이날의 상영작은 ‘시간이탈자’(감독 곽재용). 시간을 이리저리 넘나드는 스릴러 영화다. 눈을 가리고 보는 스릴러물에 대한 관객들의 이해가 가능할지 걱정이 앞섰다.

영화는 조금 특별했다. 시각ㆍ청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과 한글자막이 덧대졌다. 이런 영화를 ‘배리어프리(barrier-free)영화’라고도 부른다. ‘장벽이 없는 영화’라는 뜻이다.

걱정이 무색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영화에선 전문 내레이터의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자연스레 그 말을 따라가며 머릿속에 영화 장면을 그려보게 됐다. 시간이 긴박하게 교차되며 진행되는 장면에서도 “1983년” “2015년”, 장소 변화도 “고등학교 과학실” “경찰서 강력반” 등으로 설명해 주는 목소리 덕에 줄거리를 따라가기 어렵지 않았다. 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시나리오를 읽는 듯한 경험.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 지문(인물의 동작, 표정 등을 서술한 글)이 목소리를 통해 재현되는 느낌이 살아났다.

영화 해설에는 문학적 표현도 넘쳐났다. “알콜 램프에 연결된 유리관을 따라 수증기가 올라간다. 식은 수증기는 원두커피가 담긴 삼각 플라스크로 떨어진다. ‘윤정’ 식 커피 기계다.”

라디오드라마와도 또 다른 느낌이다. 종이를 넘길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 창문이 와장창 깨져버리는 소리 등 디테일한 사운드가 상상력을 돋궜다.

영화 중반 즈음부터는 안대를 벗고 귀마개를 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시간이다. 화면에는 한글 자막과 함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 ‘♬잔잔한 분위기의 음악♬’ ‘♬지저귀는 새소리♬’ 등 소리 설명이 이어졌다. 심지어는 욕설도 자막으로 그대로 옮겨졌다. “나침반 바늘이 XX 움직이겠지.” 색달랐다.

함께 영화를 본 스무 명 남짓의 시각ㆍ청각 장애인들은 깜짝 놀라거나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들에서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헉”이라거나 “오오” 하는 감탄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시각 혹은 청각에만 의존하는 이들에게 ‘소리’와 ‘화면’이 더욱 강한 자극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영화가 끝나고 만난 시각장애인 1급 한광우(53) 씨는 “몇 년 전만 해도 문화 활동 중에 영화관람이 가장 어렵고 희소한 활동이었다”라며 “배리어프리영화 상영이 많이 생겨서 기회가 닿는 대로 영화를 보러 온다”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1급 홍진희(48) 씨는 “이전에는 한 영화를 5~6번씩 돌려봐야 겨우 이해가 됐었는데 배리어프리영화가 생기고 난 후에는 한 번만 봐도 이해가 된다”라면서 “더불어 사운드도 좋고 화면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변화도 느낄 수 있는 영화관에서 볼 수 있어서 더 좋다”고 했다.

시각장애인들이 활동보조인의 부축을 받아 영화관에 입장하고 있다. [사진=이세진 기자/jinlee@heraldcorp.com]

배리어프리영화 제작 늘어…“비장애인도 함께 보는 영화”= 장애인들의 이같은 성원에 영화계 다양한 주체들은 배리어프리영화 제작에 팔을 걷고 나섰다.

사단법인 한국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는 2011년 ‘배리어프리영화 심포지엄’을 시작으로 한국에 배리어프리영화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 단체는 매년 가을 ‘배리어프리영화제’를 개최하고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성해 매년 10여편 내외의 배리어프리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이외에도 CJ E&M,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뉴(NEW) 등 영화제작사들이 한국농아인협회ㆍ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등과 함께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배리어프리영화를 만든다. 배리어프리 영화 한 편당 제작비는 1500~2500만 원 선. 기존 완성된 영화에 자막과 해설을 붙여 디지털 리마스터링하는 작업 등이 포함되는 비용이다.

20일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영진위의 제작지원을 받은 영화는 2011년 7편, 2012년 16편, 2013년 15편, 2014년 15편, 2015년 26편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매년 3억5000만 원 정도이던 제작지원 예산도 2015년부터는 연간 7억5000만 원 상당으로 크게 증가했다.

영화도 다양해졌다. 조정은 CJ CGV 부장(CSV/CSR 파트)은 “이전까지는 철 지난 영화를 가지고 장애인 상영용 영화로 만들어 영화제에서 틀어주는 식이었다면, 최근에는 지금 극장에 상영되는 영화를 배리어프리영화로 만들어 극장에서 장애인에게 보여주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배리어프리영화 관람 기회도 많아졌다.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멀티플렉스는 매달 정기적으로 배리어프리영화를 상영한다. 상영 회차로는 CGV가 가장 많다. 지난 2012년부터 ‘장애인영화관람데이’를 운영한 CGV는 매월 셋째 주 화, 목, 토 3일간 전국 25개 극장에서 배리어프리영화를 상영한다. 롯데시네마는 매월 셋째주 혹은 넷째주 화요일에 전국 4개 영화관에서, 메가박스는 매월 첫째주 목요일에 전국 20개 영화관에서 배리어프리영화를 볼 수 있다. 장애인의 영화관람 비용은 1000원이다. 영화관람시 50% 할인에다가, 티켓 값이 8000원인 배리어프리영화를 관람할 때는 추가로 3000원의 보조 지원을 받기 때문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나 서울역사박물관 등에서 정기적ㆍ비정기적으로 상영회가 개최된다. 공동체 상영도 있다.

이은경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홍보팀장은 “배리어프리 영화란 장애인 뿐만 아니라 한글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다문화가정이나 시청각이 퇴화된 노인, 일반적인 영화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어린이도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다”라면서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많이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jin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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