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템포 죽였더니 연기에 더 무게감이…
정극연기 시켜주면 잘할 자신
최근 종영한 MBC 예능드라마 ‘보그맘’에서 배우 정이랑(37)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천박한 졸부 사모님 연기를 기막히게 소화했다. 럭셔리 버킹검 유치원 내 사조직 엘레강스 멤버에 끼고 싶어 주위를 맴도는 유귀남 캐릭터는 정이랑을 위한 배역이었다. 연출자인 신동엽의 아내 선혜윤 PD도 기획과정에서 이미 정이랑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자리다.
정이랑은 등장하는 순간마다 신스틸러였다. 표정만 봐도 웃긴다. 찰진 입담은 정이랑의 전매특허다. ‘SNL 코리아’에서 욕 잘하는 할머니 역으로 워낙 유명해진 배우다.
“항상 단역, 누구의 친구로 나왔는데, ‘보그맘’은 저만의 이야기가 있는 역할이라 의욕이 강했고, MBC 시트콤에 대한 로망을 실현하고 싶었다. ‘SNL 코리아’에서 센 캐릭터니까 힘을 최대한 빼려고 했다. 댓글에는 ‘개그맨이라 기대했는데, 에너지가 좀 약한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다.”
정이랑은 과장 연기를 하다보면 가짜 느낌이 날 때가 있다고 했다. 그게 연기 딜레마였다. 이 점은 김원해 선배의 말이 크게 참고가 됐다. “오버 연기 하지마. 힘 빼고 해. 너가 진심으로 하면 돼. 한번 터졌다고 더 가지마. 쌈마이가 되는 거야.” 정이랑은 한 템포 자제함으로써 무게감을 얻는다고 했다.
하지만 정이랑은 “정극 연기에 대한 갈증이 많고, 시켜주면 잘할 자신도 있다”고 말했다. “욕쟁이 할머니 역을 하려고 한 게 아니고 들어오는 게 할머니 역이었다. 주로 촌스런 아줌마나 걸걸한 할머니 역을 했다.”
정이랑은 7살 이전부터 꿈이 연기자였다. 그래서 호서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한양대 교육대학원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공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면서 큰 재미를 느꼈다.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지는 못했다. 교사로 나갈 것 같아서다. 탤런트 시험 보는 곳을 찾아다녔지만 시험이 없어 이휘재, 서경석 선배가 활약하던 시기에 MBC 시트콤을 찾아다녔다. 시트콤을 좀 더 잘하려고 대학로에서 ‘개그 CEO’ 스마일매니아의 박승대 대표를 만나 오디션을 봤더니 ‘당장 나와서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개그 무대에 서게 됐다.”
정이랑은 SBS ‘웃찾사’의 폼생폼사 코너에도 나갔고, MBC 코미디언 17기 공채 시험에도 합격해 코믹 연기를 마음껏 펼쳤다. 정이랑의 콩트 연기는 ‘SNL 코리아’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박정현 모창, 레드준표 등 수많은 성대모사를 소화했다.
“오래 방송에 나가면 노출되어야 하는데, 숨어서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SNL 코리아’는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나를 인형뽑기 하듯이 뽑아내 동굴에서 빛 있는 세상으로 인도해준 구세주이자 은인이며 가족 같다.”
정이랑은 역시 욕 잘하는 캐릭터를 맡았던 후배 김슬기 생각을 많이 한다. “슬기 연기는 안정돼 있다. 나는 감정은 좋고 심장은 뛰는데, 뭔가 들떠 있다. 슬기는 정적이다. 슬기의 안정된 감정 표현법을 참고하고 싶다.”
정이랑은 서울 강남 논현동 토박이다. 오리지날 강남 키드다. 논현초등학교-구정중학교-반포고등학교를 나왔다. 기자에게 “시골에서 올라온 줄 알았죠”라고 했다.
“고등학교때 연극반이었다. 장기 자랑을 하면 무조건 나갔다. 다른 애가 나와서 분위기를 주도하면 그날 일기장에 ‘내가 나가야 되는데’라고 썼다. 그리고는 ‘앞으로 너의 자리는 없어. 내가 사인해주면 그걸로 간직해’라고 이어진다. 이때부터 쓴 일기장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이걸 바탕으로 책도 내고 싶다.”
정이랑은 모처럼 여자들의 기가 센 드라마에서 연기를 해 좋았다고 했다. 그가 맡은 유귀남은 청담동에 입성해 유기농 클렌즈 주스 카페 체인점만 50개를 거느린 CEO지만, 노름하던 습성이 남아있어, 말 끝마다 도박용어가 튀어나온다. 웃음속에 자연스레 메시지도 전할 수 있었다.
“유귀남은 아들 윌리암을 사랑하지만 내 야망 때문에 버킹검 유치원에 가게 한다. 다른 엄마들도 허세를 부린다. 허풍과 허세보다는 로봇 엄마가 더 낫다. 유아교육서 못지 않은 교육철학과 교훈을 얻었다.”
그는 최근 가족 같은 프로그램 2개가 없어졌다. ‘보그맘’은 종영했고, ‘SNL 코리아9’는 다음 시즌 준비를 위해 일단 막을 내렸다. 요즘은 태권도인인 남편이 운영하는 홍대앞 쌀국수집 ‘베트남이랑’에서 일하기도 한다.
“놀고 있으니까 좀 답답했다. 남편에게 ‘나 뭐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인천 덕적도와 가평 명지산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근데 순대국집에서 주인 할아버지가 날 알아보고 팬이라고 하고 잘 웃긴다고 하면 눈물이 핑 돌았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