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가 배도 만들었다” 새롭게, 이롭게…“우리도 바다 미래 지켜야죠” [그 회사 어때?]

〈그 회사 어때?〉

세상에는 기업이 참 많습니다. 다들 무얼 하는 회사일까요. 쪼개지고 합쳐지고 간판을 새로 다는 회사도 계속 생겨납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도, 수년을 하던 사업을 접기도 합니다. 다이내믹한 기업의 산업 이야기를 현장 취재, 데이터 분석 등을 통해 쉽게 전달해드립니다.

에코마린의 공동 창립자인 맹광희(왼쪽부터) 이사와 박덕훈 대표, 홍문현 이사가 지난 25일 부산 해운대 인근의 우동항에 정박 중인 ‘가능성(Possibility)호’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가능성호는 에코마린이 개발한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기반의 친환경 선박용 소재가 적용된 선박이다. 김은희 기자

[헤럴드경제(부산)=김은희 기자] 지난 25일 찾은 부산 해운대 인근의 우동항. ‘복붙’(복사 붙여넣기)이라도 한 듯 동일한 모습의 어선들 사이로 검은색 배 한 척이 눈에 띄었다. 크기가 얼추 두 배쯤 큰 선박에는 숫자 2를 품은 세모꼴의 재활용 표시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재활용할 수 있는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HDPE로 만든 배는 훗날 버려지더라도 재활용 소재로 다시 태어나 각종 용기나 장난감으로 쓰일 수 있다. 재활용이 어려운 데다 폐선 비용까지 비싸 방치되기 일쑤인 보통 소형 어선과는 탄생부터 소멸까지 완벽하게 다르다. 친환경 선박의 가능성을 보여준 배, 바로 롯데케미칼의 사내벤처 1호 분사 기업인 에코마린이 만든 ‘가능성(Possibility)호’의 이야기다.

이날 가능성호 선실에서 에코마린의 공동 창립자인 박덕훈 대표와 맹광희·홍문현 이사를 만났다. 5개월 전만 해도 롯데케미칼 직원으로서 사내에서 사업을 추진해 왔던 이들이지만 지난해 9월 독립법인 분사로 이제는 온전한 벤처기업인이 됐다.

박 대표는 “보통 소형선은 유리섬유 강화 플라스틱(FRP)으로 만드는데 제작 과정에서 인체에 해로운 분진이 발생하고 방수용 페인트가 녹으면서 바다를 더럽히며 재활용도 안 된다”면서 “폴리에틸렌(PE)으로 배를 만들면 환경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FRP를 대체할 소재에 대한 니즈를 파악하고 재활용 가능한 저탄소 선박용 자재 시장을 개척한 것이다. 그간 FRP의 대안 소재로 손꼽혀온 알루미늄은 비싸고 유지·보수가 어려운 데다 제작 과정에서 탄소가 다량 발생한다는 약점이 있다.

그는 “기술지원 출장을 다니다가 해외에서는 PE로 소형선을 만드는 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롯데케미칼에서 가장 많이 만드는 고품질 PE를 배에 맞게끔 재가공한 소재라면 전 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PE 보트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고 회고했다.

에코마린이 개발한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기반의 친환경 선박용 소재가 적용된 ‘가능성(Possibility)호’가 지난 25일 부산 해운대 인근의 우동항에 정박돼 있다. 김은희 기자

박 대표의 구상은 롯데케미칼의 사내벤처 ‘라이콘(LICORN)’ 1기 아이템으로 채택됐다. 다른 아이디어로 1기 최종 관문까지 올랐던 맹 이사, 홍 이사와 팀 에코마린을 꾸려 2년여간 사업화에 매진했다.

에코마린은 HDPE 기반의 친환경 선박용 신소재인 ‘에버마린’을 자체 개발했다. 소재 기술력을 증명하기 위해 선박 설계·건조 기업 대해선박기술과 손잡고 에버마린을 적용한 배도 직접 제작해 띄웠다. HDPE는 밀도 대비 강도가 높아 가볍지만 충격에 강하고 열에 녹아 재활용할 수 있다.

친환경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에버마린의 강점은 단순히 환경에 이롭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일단 가능성호는 동일 크기의 FRP 선박 대비 30~40% 가벼워 속도가 빠르고 연비가 좋다. 물에 뜨는 성질이 있어 적재능력이 뛰어나고 소재가 부드럽다 보니 엔진의 진동이나 소음을 흡수해 승선감도 좋은 편이다. “일반 어선이 ‘마티즈’라면 가능성호는 ‘제네시스’”라고 박 대표는 자신했다.

뿐만 아니다. 표면이 미끄러운 덕에 선체 하단에 따개비가 붙지 않아 페인트칠하지 않아도 되고 따개비를 떼어내는 수고도 던다. 외부충격에 약한 FRP와 달리 내충격성이 좋아 갯바위 주정차에도 파손 위험이 적으며 관리 비용이 적게 들어 선박을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다.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선박의 주요 특징 [롯데케미칼 제공]

박 대표는 “아직은 FRP 선박보다 가격이 10~20% 비싸지만 소재가 보급화돼 생산 및 용접·제작하는 시간이 단축되면 FRP 선박과 같거나 더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다”면서 “페인트 등 유지 비용도 연간 1000만원은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에코마린은 에버마린에 대한 국제 인증 절차를 밟고 있다. 조만간 인증을 받으면 국제해사기구가 정한 안전 인증을 통과한 최초의 PE 선박 소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향후 기능성 향상, 색상 다변화 등을 통해 신제품도 선보일 예정이다.

에코마린이 개발한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기반의 친환경 선박용 소재인 에버마린 판재(왼쪽)과 용접봉 모습 [롯데케미칼 제공]

가능성호는 에코마린과 에코마린이 만든 신소재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줬다. 2022년 4월 부산국제보트쇼에서 올해의 보트 대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9월 ‘2023 환경창업대전’에서는 아이디어 부문 최우수상을, 같은 해 10월 정부부처 합동 창업 경진대회 ‘도전! K-스타트업 2023’에서는 우수상을 각각 받았다.

에코마린은 현재 다양한 파트너사와 소재 판매 및 기술 교류를 맺고 활발하게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산하 해양교통안전공단과 함께 HDPE 선박 관련 제도를 만드는 데에도 일조하고 있다.

이미 해군에는 HDPE 선박 3척을 납품했고 해경에 공급할 2척도 조만간 제작에 들어간다. 전남도 친환경 HDPE 소형어선 규제자유특구 사업 참여로 올해에는 어선도 3척 정도 만들려고 추진 중이다. 자체 개발 용도로 따로 소재만 사간 기업도 6~7곳 정도라고 박 대표는 귀띔했다. 현재 접촉 중인 국내 중소 조선소도 10개소다.

에코마린은 분사 직후인 2023년 4분기 약 1억5000만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올해 기대 매출도 5억원 정도다. 박 대표는 “당장은 매출보다도 시장이 형성되는 게 중요하다”면서도 “매출이 나온다는 게 시장에서 통한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아니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달에는 한 액셀러레이터(초기 투자사)로부터 투자금도 유치했다. 독립법인 분사 당시 롯데케미칼로부터 투자받은 5억원까지 하면 시드 단계에서의 자금은 충분하다고 에코마린은 보고 있다.

에코마린은 올해를 본격적인 사업 기반 강화의 해로 삼고 매출 확대, 직원 채용, IP(지식재산권) 확보에 주력하고 시리즈A 투자를 준비할 예정이다. 박 대표는 “추가 투자 유치 노력보다는 HDPE 어선을 만드는 데 집중할 방침”이라며 “필요하다면 판재 생산량을 늘리고 판재 크기를 키우기 위한 공장도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에코마린이 개발한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기반의 친환경 선박용 소재가 적용된 ‘가능성(Possibility)호’가 지난 25일 부산 해운대 인근의 우동항에 정박돼 있다. 선체에 100%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표시가 새겨져 있다. 김은희 기자
에코마린이 개발한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기반의 친환경 선박용 소재인 에버마린을 활용해 친환경 선박을 만들고 있는 모습. [롯데케미칼 제공]

에코마린은 이제 막 발을 뗀 기업이지만 롯데케미칼의 지원이 없었다면 첫발을 내딛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박 대표는 단언했다. 그는 “친환경·재활용 사업에 관심이 많았는데 사내벤처로는 실패해도 다시 회사에 복귀할 수 있다 보니 리스크를 줄이고 도전해 볼 수 있었다”면서 “2년이라는 자유로운 시간을 내주면서 프로젝트 자금도 2억원이나 지원해 줘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업화 여부를 결정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길이 16m, 높이 4m, 무게 4t에 달하는 실물 선박을 제작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것도 든든한 제도 덕분이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롯데케미칼로서도 에코마린의 선전은 반가운 일이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사내 문화 형성과 신사업 발굴을 위해 도입한 사내벤처 제도가 빛을 보고 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롯데케미칼은 2021년부터 사내벤처 제도를 운영 중이다. 최근 4기까지 모집을 마쳤고 2·3기 팀이 현재 사업화를 준비 중이다. 사업 분야를 석유화학에만 국한하지 않다 보니 바이오, IT(정보기술), 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다는 전언이다.

박덕훈 에코마린 대표가 지난 25일 부산 해운대 인근의 우동항에 정박된 ‘가능성(Possibility)호’ 선실에서 회사가 자체 개발한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기반의 친환경 선박용 소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은희 기자

향후 롯데케미칼과 에코마린의 친환경 소재 사업 시너지도 기대되는 대목이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9월 물리적·화학적으로 재활용한 리사이클 플라스틱 소재(PCR)와 바이오플라스틱 소재(Bio-PET)를 친환경 브랜드 ‘에코시드(ECOSEED)’로 통합했다. 친환경 사업을 확대해 2030년까지 에코시드 100만t을 공급할 계획이다. 에코시드는 일상에서 주로 사용되는 대부분의 플라스틱을 재활용할 수 있는 고품질 제품군을 보유하고 있다.

에코마린은 2030년 내 30% 재생 원료 사용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재활용 기반의 소재 확대와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통해 롯데케미칼과 시너지를 내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동행한다는 방침이다.

신동빈(맨오른쪽)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 2022년 5월 롯데월드타워 아레나 광장에서 열린 롯데케미칼의 친환경 프로젝트 전시회 ‘에브리 스텝 포 그린’(Every Step for Green)에서 ‘가능성(Possibility)호’에 올라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가능성호는 에코마린이 개발한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기반의 친환경 선박용 소재로 만든 선박이다. [롯데케미칼 제공]

에코마린은 지난 2022년 5월 롯데월드타워 아레나 광장에서 열린 롯데케미칼의 친환경 프로젝트 전시회 ‘에브리 스텝 포 그린’(Every Step for Green)에 참여했는데 이때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가능성호에 직접 올라타 친환경 선박 소재에 대해 관심 있게 살펴보기도 했다.

신 회장은 당시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진정성 있는 ESG 경영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 회장이 2021년 그룹의 새 슬로건으로 ‘오늘을 새롭게, 내일을 이롭게’를 제시하며 새로운 미래를 제시했듯 에코마린은 ‘선박을 새롭게, 바다를 이롭게’를 내세우고 있다.

박 대표는 “플라스틱도 잘 회수하고 자원화하면 어느 소재 못지않게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친환경 소재”라며 “레저보트 글로벌 시장으로 일본, 나아가 미국에 진출하고 장기적으로는 해상풍력, 양식장 등 모든 해양 구조물을 친환경 플라스틱으로 대체하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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