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마니, 한국 기업이었다면 팔렸다? 경영권에 기부까지 막는 ‘킬러 규제’ 뭐길래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재단을 통해 최고경영자를 선임하며 그룹의 독립 경영을 유지하고 있다. 사진은 창업자 조르지오 아르마니. [아르마니 홈페이지]

[헤럴드경제=김현일 기자]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지난 2016년 외부인이 회사 지배력을 갖거나 해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을 통해 최고경영자와 디자이너를 선임함으로써 그룹의 독립 경영을 유지하며 창업자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창업자 아르마니는 직접 재단을 이끌며 수익금 중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도 밝혔다.

구찌·펜디 등 다수의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커링과 LVMH 등 거대 그룹에 매각되고, 최근 베르사체가 미국 패션 그룹 마이클 코어스에 팔리는 것을 보면서 창업자인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이 같은 특단의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공익재단을 통한 그룹 지배는 허용되지 않는다. 재단은 경영에 관여할 수 없고 재산 처분이나 주식 취득도 모두 제한된다. 이에 따라 재계에선 공익법인에 대한 과도한 규제가 기업의 승계는 물론 사회공헌 활동 및 기부문화까지 위축시킨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는 29일 최승재 세종대 법학과 교수에게 의뢰해 발간한 ‘공익법인 법제 연구’ 보고서를 통해 공익법인의 의결권 제한을 폐지하고 면세가 적용되는 주식취득 한도를 확대하는 등 전면적인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현행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상출제) 소속 공익법인이 계열사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공익법인이 총수 일가의 지배력 확대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반면 미국, 일본, 독일, 스웨덴 등 주요국에는 이 같은 규제가 없다.

다만 상장사의 경우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응할 수 있도록 공익법인이 특수관계인과 합산해 15% 내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최승재 교수는 “기업 소속 공익법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입법에 투영된 것”이라고 지적하며 “공익법인의 의결권 제한으로 주식가치 훼손이 우려될 뿐만 아니라 향후 기업의 사회 환원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증세법)은 공익법인이 기업으로부터 의결권이 있는 주식을 출연받는 경우 총 발행주식 수의 10%가 넘으면 초과분에 대해 증여세를 부과한다. 상출제 기업집단 소속 공익법인은 5%까지만 면세를 받을 수 있다.

반면 미국은 20%까지 면세를 인정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공익사단법인 및 공익재단법인 인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총 발행주식 수의 50%까지 취득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 별도의 상속세 및 증여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최 교수는 “우리나라 공익법인에 대한 규제는 주요국과 비교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강력하다”며 “상출제 소속 기업들이 증여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면세 한도를 넘지 않는 선까지만 공익법인에 출연하게 돼 사회공헌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익법인이 일부 그룹의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비판에 대해 최 교수는 “경영권 강화를 위해 공익법인을 활용한다는 우려가 공익법인 자체를 죽이게 될 우려는 없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현행 규제에 대한 재검토를 주장했다.

그는 “사회적 취약계층 지원 등 국가가 수행해야 하는 사회적 과제를 기업이 공익재단을 통해 대신 해결하는 순기능을 하고 있다”며 “우리 법제가 공익법인의 이러한 순기능은 고려하지 않고, 공익법인의 존속 가능성까지 저해할 우려가 있는 강력한 규제 기조만을 유지하는 현 상황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공익법인 출연자가 이후 재단 경영에 참여할 수 없는 점도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 기부금을 출연자 의사와 다르게 사용하더라도 제한할 방법이 없어 자칫 기부문화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최 교수는 “ESG, CSR 등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공익법인’이라는 지속 가능한 형태로 이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각종 규제들에 가로막혀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공정거래법상 의결권 제한 규제를 폐지하고 상증세법상 주식 취득 면세 한도를 미국 수준인 20%로 확대하는 등 전면적인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실제 공익법인에 대한 강력 규제가 한국의 기부문화를 저해한다는 점은 국제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영국 CAF(자선지원재단)에서 발표한 ‘2023년도 세계기부지수(WGI, World Giving Index)’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부참여지수는 38점으로 142개 조사대상국 중 79위를 차지했다. 이는 전년(35점, 88위) 대비 소폭 상승한 수치이긴 하나, 미국(5위), 영국(17위) 등 주요국에 비해 여전히 낮은 순위다. 한국의 기부 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한 것은 공익법인에 대한 강력한 규제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다. CAF는 2010년부터 매년 120여 개국 대상 세계기부지수를 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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