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마퇴본)에서 만난 박영덕 마퇴본 중독재활센터장. 그는 올해 정년퇴임한다. 임세준 기자 |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마퇴본) 중독재활센터장. 이 직함으로 올해 정년을 맞아 퇴임을 앞두고 있는 박영덕(60) 센터장. 그는 “한 번도 이 직장을 회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저에겐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준 곳”이라고 밝혔다.
16살에 가출,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20여 년간 필로폰 등 여러 마약을 투약했던 그는 마흔 살이 되면서부터 마약중독자의 재활을 돕는 일을 시작하며 20년을 단약해 왔다. 사람이 180도 달라지려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 일은 2002년 서울역에서 벌어졌다.
▶“중2 때 시작한 본드, 필로폰까지 이어져”=마약 중독, 당뇨, 우울증, 자살시도가 연이은 그의 삶은 결국 서른여덟 살에 서울역 신문지 한 장 위의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른 노숙자가 와서 자리를 내놓으라며 발로 차도 한마디 응수할 수도 없을 정도로 기력이 달렸다. 발길질에 비척대며 일어나 다른 곳으로 신문지를 옮겨야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노숙자들의 눈에도 불쌍했을까. 그들은 박 센터장에게 밥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박 센터장은 “다른 노숙자가 보기에도 제가 너무 안됐는지 숟가락을 쥐어주면서 자기들 먹는 ‘빨간 다라이(대야) 비빔밥’에 초대하더라. 그런데 그때까지도 제가 마음속으로는 ‘나는 너네랑 달라’라는 마음이 있었는지 거부하고 숟가락을 팽개쳤다”고 회상했다. 며칠을 더 누워만 있던 박 센터장에게는 요일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어느 날 아침 찬송가 소리가 들리기에 ‘일요일이구나’ 했다. 교회에서 나와 밥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다른 노숙자들이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아도 그는 눈을 감고 버텼다. 그때였다. 눈앞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깜깜한 눈을 비집고 빛이 들어오면서 동시에 잡힌 물체는 아주 더럽고 불결한 손, 그리고 그의 앞에 내밀어진 식판이었다.
박 센터장은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엄청 더럽고 시커먼 손이었다. 그 노숙자가 자기가 밥을 받아서 저한테 가져다 준 거다”고 했다. 이어 “이상하게 지금 그 사람 얼굴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오직 그 손만이 기억난다”고 덧붙였다.
어쩌다 보니 그 식판을 받아들었다. 밥과 국물을 동시에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었다. 얼마만의 곡기인가. 목에서 울컥하고 뭔가 쏟아져 나왔다. 너무 오랜만에 밥을 먹으니 위장이 거부하는가 싶었다. 눈물이 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목구멍에서도 쏟아져 나올 수 있음을 알았다. ‘꺽꺽’ 울면서 식판을 비웠다. 왜 우는지 모르겠는데 도통 그칠 줄을 몰랐다.
박 센터장은 “그 사람은 그날 이후로도 자꾸 저한테 먹을걸 나눠줬다.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노숙자도 불쌍해하는 나는 노숙자에 마약중독자, 당뇨환자…. ‘아, 나는 도움이 필요하다.’수십년 만에 처음 든 생각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노숙자를 돕는 단체와 연결이 돼 박 센터장은 알코올중독 등을 치료하는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간 “억지로 처넣어진” 정신병원은 여러 곳 전전했지만, 이렇게 제 발로 찾아 들어간 병원은 처음이었다.
그는 “몇 달간 입원 치료를 끝내고 나자 의사선생님이 사회에 나가서 마약중독을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을 알아봐줬다. 그게 바로 마퇴본이었다. 2003년부터 생활지도사로 시작해 지금 센터장을 하고 있는 제 직장”이라고 말했다. 박 센터장은 스스로 닭살이 돋고 간지러웠다. 그래도 해보라고 하기에 시작했다.
시작은 본드였다. 그가 중학교 2학년이던 1970년대에는 마약이 아니라 유해화학물질이라고 해서 본드가 있었다. 그리고 중3이 되면서부터는 러미나와 루비킹이라는, 감기약이지만 환각작용을 가져오는 의료용 약물로 넘어갔다. 그는 “스스로 비행청소년이 돼 양아치들과 계속 어울리다 보면 누가 딱히 꼬드겨서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쉽게 마약으로 넘어가 대마, 필로폰까지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하며 큰 돈 벌었지만 마약 탓 다 날려”=밖으로 겉돌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불화를 꼽았다. 박 센터장은 “그 시절 대학 나와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장남인 저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컸다. 그게 버거웠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나를 개처럼 팼다. 중학교 3학년 말에 가출하고부터 지금까지도 아버지 얼굴을 안 본다”고 텅털어놨다. 가출한 10대 청소년에게 집이 되어 준 곳은 한 유흥업소였다. 그는 “요즘말로 치면 ‘호빠’다. 당시에는 특별히 지칭하는 말이 없었는데, 충무로에서 여성 고객을 상대하는 가게에서 숙식하며 일했다. 그중에서도 외국인 여성이 주요 고객층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9)70년대 여느 회사 과장급 봉급이 30만원이던 시절, 저는 하루에 100달러, 200달러를 벌었다. 당시 환율 생각하면 하루에 7만~8만원을 번 것인데, 한 달을 가게에서 먹고 자면서 꼬박 일하니 꽤나 많이 벌었지 않나. 그런데 그렇게 벌어도 버는 만큼 명동 양복점, 호텔, 이런 데서 비싼 옷 맞춰입고 장신구 사들이느라 모으는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한 일본 손님과는 파트너 관계로 나아갔다. 그는 “1년 동안 사귀면서 같이 마약을 했다. 일하는 시간에도 마약에 취해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사장이 손님을 못 받게 하는 일도 있었다. 또 스무 살 때에는 다른 미국 손님의 눈에 들어 동거를 시작했다”고 했다. 이 손님과도 끝내 헤어졌지만 떠나면서 한국 집 전세 보증금 3000만원을 그에게 선물로 주고 갔다. 유흥업소를 나와 직접 가게를 차렸다.
박 센터장은 “했던 일이 어디 가겠나. 스물네 살에 서울 돈암동에 카페를 차렸다. 점심에는 커피, 밤에는 술을 팔았다”고 했다. 이어 “손님 중에 여러 명이랑 사귀었다. 양다리가 아니라 열 다리도 걸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가 없으면 불안하고 외로웠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박 센터장의 생활엔 마약이 늘 함께였다. 그는 “필로폰은 사실 성관계를 위해 하는 약이다. 약 없이 살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동대문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여자를 만나 일명 ‘셔터맨’으로 일해주며 사귀었다. 그러다 카페를 권리금 받고 넘긴 돈으로 직접 제 옷가게를 내어 사업을 시작했다. 옷장사를 하다 그 다음엔 용산전자상가로 진출했다. 이때 컴퓨터를 팔면서 번 돈이 꽤 쏠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돈은 많이 버는데 마약도 하고 사리분별이 안 돼 보이니 주변에서 노리는 쉬운 타깃이 됐던 것 같다. 도박에도 빠졌고 사기도 당해서 모은 돈을 다 잃었다. 이때 제 나이 서른 살이었다”고 말했다.
동전 한 장 없이 빈털털이가 되자 사채를 빌려서 마약을 구했다. 그는 “이때부터는 이성에 대한 관심이 싹 사라졌다. 대신 전과가 늘어났다”고 밝혔다. 어머니가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고, 그는 그곳에서 난동을 부리고, 탈주하고, 마약, 폭행 등 혐의로 경찰서를 찾았다.
몇 년간 정신병원만 10군데 넘게 옮겨다녔다. 환자를 험하게 다루기로 유명한 병원으로까지 들어갔다. 어느 날 혈액검사에서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 병원은 그를 강제로 퇴원시켰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제약회사 다니는 지인에게 “야, 한번에 훅 가는 약 없냐”고 연락했다.
사실상 자살을 기도한 그는 삶에 의지가 없었다. 병원에서 나온 박 센터장이 당도한 곳은 앞서 소개한 서울역 노상이다. 더는 화도 나지 않고, 식욕도 돋지 않았다. 그가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붙잡고 올라온 것은 여느 전문가의 손이 아닌, 동료 노숙자의 ‘더러운 손’이었다.
▶“‘버닝썬’ 이후 아들도 ‘과거’ 알게 돼”=센터에서 활동가로 일하며 몇년이 지나자 중매가 들어왔다. 이미 마흔세 살이었다. 도대체 어떤 여자가 나 같은 사람이랑 살까 싶었다고 한다. ‘마약중독’이 뭔지도 모르는 여자였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된 아들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제 인생을 알게 되면 아빠를 부끄러워할 것 같아 2019년도 이전에는 감추는데 급급했죠. 그러다 ‘버닝썬 사건’으로 한국 사회에서 마약류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면서 방송에 출연하고, 그 이후부터 언론에 여러 번 노출됐습니다. 아들도 당연히 방송과 기사를 봤죠. 아들에게 허락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계속 올바르게 살아갈 자신을 그렇게 얻었습니다.”
박 센터장은 자기는 아직도 어둠의 수렁에 발 한쪽을 걸친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그러므로 마약중독자들을 밑에서 함께 ‘밀어 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생의 중간 3분의 1을 마약으로 방황하고, 그 다음 3분의 1은 아이들이 자라는 걸 보면서 살고 있다. 약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고 지난 세월을 꾹꾹 눌러 담아 고백했다. 이민경 기자